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괜찮은 작가 imkylim Aug 16. 2024

장비 질량 보존의 법칙

    장비만 갖췄다가 제대로 하지 않은 게 많다. 유치원생이던 딸이 인라인스케이트를 배운다는데 같이 하자며 내 장비까지 샀었다. 친구 같은 엄마라는 로망이었지만 딱 한 번 만에 그만뒀다. 신발 바닥에 붙은 바퀴가 멋대로 돌자 덜컥 겁이 나서였다. 자칫 넘어져 다치기라도 하면 어린 아들과 딸을 돌보기 어렵다는 핑계를 댔다. 딸이 크면 물려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내 사이즈가 되었을 때 딸은 이미 인라인스케이트를 타지 않았다. 다른 예도 더 있지만 생략하겠다.


  미술 관련해서는 더했다. 나의 미술에 대한 호기심은 주기라도 있는 듯 가끔 불타올랐다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같은 장르를 반복하면 좋겠는데 그렇지도 않았다. 유화를 배워보겠다고 유화물감, 붓, 나이프, 팔레트를, 펜화를 그려보겠다고 브리스톨지를, 캘리그라피를 배워보겠다고 벼루와 화선지를, 수채화를 그려보겠다고 수채물감과 수채화 용지를 마련했다. 이젤과 캔버스를 포함한 그것들은 우리 집 발코니 구석에 쌓여갔다. 언젠가 다시 그리고 싶다는 욕구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그때 저 장비 중 무언가가 쓸모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버릴 수도 없었다.


  이건 내가 얼마나 하려나? 우연히 알게 된 어반스케치에 관심이 생기면서 제일 먼저 든 의문이었다.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발코니의 무더기 속에는 수채화 용지와 물감이 있었다. 손바닥보다 작은 팔레트와 피그먼트 펜 한 자루만 더 마련하면 되었다. 오랜만에 열어본 수채화 물감 중 일부는 딱딱하게 말라 있었다. 쓸만한 튜브만 모아 새로 산 팔레트를 채웠다. 흥미가 오래 갈 거라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 물감과 집에 있는 종이만 다 써도 성공이었다.


  수많은 펜과 붓을 빼곡하게 채워 그럴듯해 보이는 어반처스의 화구가방과 헐렁한 나의 가방은 극명한 대비를 이루었다. 어반처스는 대개 그림에 대한 열정만큼이나 장비 욕심이 많았고 종이, 물감, 펜 등에 대한 의견 교환을 자주 했다. 나는 그들을 통해 arches라는 종이를 아치스가 아닌 아르쉬라고 읽는다는 것과 글루로 붙은 덩어리 수채화 용지에서 종이를 한 장씩 떼는 방법을 배웠다. 방수 잉크, 오묘하고 다양한 색상의 물감, 휴대용 이젤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의 멋진 용구를 보면서도 마음을 다잡았다. 열정은 곧 사그라들 테니 탐하지 말지어다. 그런데 웬걸? 가볍게 그려낸 일상과 거기에 글귀를 더하는 재미가 꽤 좋았다.


  어느덧 어반스케치 모임에 나간 지 일 년 반이 넘었다. 의외의 상황이 펼쳐진 것이다. 그사이 나는 저널 북을 잡아주는 클립을 세 개나 선물 받았다. 집에 있던 오래된 수채화 붓이 닳고 종이를 다 써서 새로 샀다. 어쩌다 써 본 후데펜이 마음에 들어 펜과 잉크를, 밖에서 지우개 가루를 흘리고 싶지 않아 떡지우개도 마련했다. 결국 집에 있던 것 중에 줄고 있는 건 물감뿐, 내 장비는 없앤 만큼 또 채워지고 있다. 이 정도면 장비 질량 보존의 법칙이라도 있는 게 분명하다. 

이전 06화 전시회 초대 글은 어떻게 쓰는 거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