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스커피를 처음 마셔본 것은 중학생 때, 어머니와 함께 걷던 길 한쪽에 놓인 자판기에서였다. 어머니가 한 모금만 마셔보라고 주셨는데 그때껏 경험해 본 적 없는 맛이었다. 씁쓸하면서도 달콤했다. 그때 내 표정이 신세계를 경험한 환희에 차 있었나 보다. 어머니는 단호하게 말씀하셨다. 커피를 많이 마시면 머리가 나빠진다고. 그래도 나는 고등학교 시절 종종 자판기 커피를 마셨다. 종이컵 안의 커피는 답답한 고교 생활에 작은 기쁨이었다. 진짜 머리가 안 좋아지면 어쩌지, 하는 근심 따위 대수롭지 않을 만큼.
바흐가 커피 칸타타를 작곡했던 17세기에는 의사들이 경고했단다. 커피가 피부를 검게 하고 임신할 수 없게 한다고. 그런데도 커피 칸타타에 등장하는 딸은 커피를 천 번의 키스보다 황홀하고 맛 좋은 포도주보다 달콤하고 부드럽다며 노래한다. 당시 사람들이 커피를 어떻게 마셨는지는 모르겠다. 달콤하고 부드럽다는 말에 비추어 설탕과 우유를 섞어 마셨을 듯하다.
나는 조금 전, 노트북 옆에 놓인 맥심 아이스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고개를 끄덕인다. 바흐가 맛본 커피 맛이 우리나라의 믹스커피에 비할 바는 아니었으리라. 믹스커피는 여러모로 훌륭하다. 일단 손쉽게 같은 맛을 낼 수 있다. 맛있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물양이 적혀 있지만 취향에 따라 물을 더 넣을 수도, 덜 넣을 수도 있다. 카페에서 사 먹는 음료보다 훨씬 저렴하지만 작고 예쁜 잔에 담아 내어놓는다면 캐러멜 마키아토나 바닐라 라테 못지않을 것이다. 문득 믹스커피가 열량과 건강 문제로 뭇매를 맞았던 게 생각난다. 커피 전문점의 캐러멜 마키아토 한 잔과 믹스커피 한 잔, 어느 쪽 열량이 더 높을까. 첨가물은 또 어떨까.
믹스커피에 대한 인식 변화는 가요만 봐도 알 수 있다. 2001년 발매된 토이의 <좋은 사람>에서 감춰온 마음을 담았던 것도, 2008년에 발매된 장기하의 <싸구려 커피> 속 적잖이 속이 쓰리다는 싸구려도 믹스커피다. (장기하 인터뷰 기사에서 확인한 바 있다). 그뿐 아니라 카페가 많아지면서 믹스커피는 다방 커피, 나이 든 사람이 마시는 커피라는 편견까지 생겼다.
고백한다. 코피 루왁 그림을 그려놓고 믹스커피 예찬을 쓰는 것은 마셔 놓고 마음이 편치 않아서다. 내가 마신 건 100% 코피 루왁이 아닌 블렌드다. 꽤 부드럽고 향긋했다. 하지만 풍미라는 고상한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코피 루왁은 사향고양이의 소화 과정을 통해 생산된다. 고양이가 자연적으로 배설한 똥만 수거해서 만드는 게 아니라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가둬놓고 커피 열매만 먹인다고 한다. 뛰어놀지도, 골고루 먹지도 못하는 그 고양이들은 세상에 대한 증오와 원망의 똥만 눌 것 같다. 그 똥에 묻혀있던 커피라니. 글을 쓰며 되짚어 보니 저 그림 속 코피 루왁도 마시지 말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