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위에서 두 팔 벌려 기도하는 노인과 하느님의 손이 먹구름으로 연결된다. 오른쪽에 까마귀는 어디론가 향해 가고, 반대편에선 나뭇가지를 문 비둘기가 그에게 다가온다. 햇살 가득한 샛노란 하늘은 이제 기나긴 폭우가 끝났음을 나타낸다. 아파트 모양의 배 안에는 여러 남녀와 동물들, 먹고 마실 양식도 보인다. 하느님의 명에 따라 방주에 몸을 실은 이들은 홍수로 파멸된 세상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 이야기는 구약에서 지구적인 상상력을 자극하는 가장 흥미로운 사건 중에 하나다. 창세기 5장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는 아담의 10대손으로, 카인에게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태어난 셋의 후손이다. 셋의 자손들은 주님을 섬기기 시작했지만, 앞선 문명을 만들어낸 카인의 자손들로 인해 세상은 점차 폭력과 죄악이 가득 차게 되었다. 이에 하느님은 인간을 만든 것을 후회하며 세상을 물로 쓸어버리기로 작정한다. 하지만 하느님 뜻에 따라 살던 노아를 살리기 위해 그에게 방주를 지으라 명하신다. 노아는 하느님의 명령대로 가족들과 방주를 짓고 모든 동물의 암수를 데리고 들어간다. 40일 동안의 대홍수 끝에 세상이 물바다로 변하자 결국 모든 숨 쉬는 생물이 죽는다(몇 개의 전승이 편집된 창세기 6-8장에서 대홍수의 과정이나 순서, 기간 등이 이와 다르게 묘사된 부분도 있다). 노아는 땅에 내려와 하느님께 번제를 바쳤고, 기뻐 받으신 하느님은 다시는 물로 세상을 멸하지 않겠다는 계약의 증표로 하늘에 무지개를 띄운다. 땅에 정착해 포도 농사를 짓던 노아는 어느 날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고 곯아떨어졌다. 세 아들 중, 함이 아버지의 치부를 떠벌렸다면 셈과 야펫(야벳)은 아버지에 대한 예를 지켰다. 이를 알게 된 노아가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알려진 바와 같이 홍수 설화는 다양한 문명권에서 존재했고 유사한 패턴으로 전개된다. 특히 히브리 민족의 무대였던 메소포타미아에서 성경 이전에 쓰인 아트라하시스 이야기와 유명한 『길가메시 서사시』안에 우트나피쉬팀 이야기가 대표적이다. 인간에게 염증을 느낀 신이 세상을 멸하기 위해 홍수를 일으키지만 유일한 인물을 통해 인류가 이어진다는 전체적인 서사뿐만 아니라 세부 요소도 매우 비슷하다. 신이 명한 대로 방주를 만들고 짐승을 종류별로 싣는 것, 마른땅을 찾기 위해 새를 날려 보낸 것, 산봉우리에 정박한 방주에서 나와 제사를 드린 것 등이다. 홍수 설화는 실제 예측 불허의 범람을 경험했던 사람들이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했는지를 엿보게 해 준다. 이들에게 큰 물은 혼돈이기도 했지만 모든 것이 리셋되는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기도 했다. 이러한 맥락에서 노아의 이야기도 타락한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의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더러워진 세상의 정화를 통한 재창조로도 이해할 수 있다. 또한 구약의 대홍수는 신약 시대의 세례에 비견된다. 나에게는 고대 근동의 홍수 설화들과 노아 이야기와의 차이점이 무척 흥미로웠다. 홍수 설화에서 신들은 인간이 많아지고 소란스러워지자 물로 쓸어버렸다면, 노아의 하느님은 세상에 만연한 타락과 불의를 참을 수 없어 홍수를 일으키셨다. 게다가 아트라하시스나 우트나피쉬팀은 신적 지혜를 갖춘 현인이었기 때문에 선택되지만, 노아는 흠 없는 의인이었기 때문에 선택되었다.
구약은 유독 의로움, 무엇이 옳고 의로운지를 따지는 경전이다(주원준, p. 75). 하느님과 함께 걸었던 구약의 사람들을 설명하는 워낙 중요한 단어이기 때문에 좀 더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공정, 정의를 떠올리게 하는 의로움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의로운 가르침(율법)의 실천을 강조했다(로 2,13). 구약 학자들은 이 단어 ‘쩨다카(히브리어)’를 공의, 즉 올바른 관계로 해석한다. 쉽게 풀이하면 ‘기뻐하는 이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이들과 함께 우십시오’(로 12,15)다. 다시 말해 올바른 관계란 이웃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하느님의 비전/뜻에 대한 공감을 의미한다(김근주 https://www.youtube.com/watch?v=7Sm0FvSXflQ ). 인간 세계에 끊임없이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던 하느님 또한 의로운 분이셨고, 신이 우리에게 원한 것도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마 6, 33)을 찾는 것이었다.
“나는 모든 살덩어리들을 멸망시키기로 결정하였다. 그들로 말미암아 세상이 폭력으로 가득 찼다. 나 이제 그들을 세상에서 없애 버리겠다. 너는 전나무로 방주 한 척을 만들어라.”(창 6, 13-14)
의롭고 흠 없는 사람 노아가 하느님의 목소리가 들었던 순간을 담아낸 화가가 있다. 매우 드문 예인데 러시아 태생의 유대계 화가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의 성경 삽화다. 그는 평생 구약성경을 소재로 구아슈나 판화 등 다양한 버전의 삽화를 남겼다. 수많은 별이 수 놓인 한밤중에 온몸이 하얀 천사가 노아에게 나타나 하느님의 말씀을 전한다. 그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하늘에는 히브리어 ‘야훼(YHWH, יהוה)’가 보일 듯 말 듯하다. 전통적으로 신을 형상화하지 않는 유대 전통을 반영해 하느님을 문자나 천사로 대신 표현한 것이다. 노아는 두 손을 모으고 무척 설레는 얼굴로 천사의 말을 주의 깊게 듣는다. 오백 살 경에 아들 셈과 함과 야펫(야벳)을 낳은 후이기 때문에 노아는 보통 수염 난 노인으로 묘사된다. 우주의 한복판 같은 곳에서 이루어진 천사와 노아의 만남은 가히 환상적이다. 천진난만하면서도 경외에 찬 노아의 얼굴은 아마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약자들을 포함해 수많은 사람들과 온갖 생물들이 물속에서 생을 다한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마른하늘에 날벼락같은 이 명령을 듣고 노아는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 어떻게 황당무계한 명령에 의심 없이 백 년 넘게 가족과 함께 묵묵히 방주를 지을 수 있었을까? 내가 세상에 마지막 의인, 노아였다면 어떻게 반응했을까.
이어 하느님은 노아에게 방주의 크기와 모양, 구조까지 자세히 알려주신다. 전나무로 지은 방주는 대략 길이 150m, 폭 22m, 높이 12m(3층)의 거대한 규모로, 물이 스며들지 않도록 안과 밖을 역청으로 칠해야 했다. 작은 방들과 꼭대기에 지붕을 만들고 방주 옆쪽에 문을 다는 구조였다(창 6, 14-16). 중세의 미술가들은 방주에 집중했지만, 그것을 정확하게 그리는 것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자유로운 상상으로 상자, 집, 우주선, 아파트 모양 등 다양한 형태의 방주가 등장한다. 두 삽화는 이후의 이야기로 마른땅을 찾기 위해 노아가 보냈던 비둘기가 나뭇가지를 물고 돌아온 순간을 담았다. 그런데 왼쪽에 아파트 모양의 방주는 각방에 (예외도 있지만) 동물들과 새, 괴수까지 암수를 모두 태운 것을 강조했다. 하단에 묘사된 떠다니는 시체와 대조적으로 단단한 방주 안의 동물과 노아의 가족은 안전해 보인다. 오른쪽 방주에는 동물들은 물론 먹을 양식까지 빼곡히 들어차 있다. 방주 위쪽은 특이하게도 교회로 장식되어 있다. 신자들을 구원으로 이끄는 교회를 부활의 상징이자 구원의 상징인 방주에 비유한 것이다.
1장에서 살펴보았던 몬레알레 대성당의 남쪽벽 모자이크에는 노아의 이야기가 6장면이나 할애되었다. 도판이 좋지 않지만, 그 가운데 방주가 등장하는 네 장면을 살펴보려고 한다. 가장 왼쪽에 노아의 지시에 따라 가족과 일꾼들이 망치와 도끼, 톱으로 나무를 자르고 다듬으면서 방주 건조에 몰두해 있다. 성경에서는 노아가 오백 살 경에 세 아들과 며느리들이 함께 120여 년에 걸쳐 방주를 예비한 것으로 묘사된다. 이 대목에서 당시 8, 9 백세를 넘는 수명이 당혹스럽지만, 이후 인간의 수명이 단축되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다음은 완성된 방주에 가족들이 탄 후, 동물들을 태우는 장면이다. 이어 홍수로 물바다가 된 세상에서 비가 그친 후에 노아가 물이 빠졌는지 알아보려고 날려 보냈던 비둘기를 맞고 있다. 비둘기가 나뭇가지를 물고 온 것으로 보아 땅이 드러났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도 노아가 비둘기 전에 정탐을 보냈던 까마귀는 물속의 시체를 뜯어먹고 있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물이 빠지고 산봉우리에 정박한 방주에서 노아의 가족들이 동물들을 내려준다. 그 옆으로는 노아의 제사와 포도 재배, 노아의 만취 장면이 이어진다. 이렇듯 이야기 전달에 집중한 중세의 성화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 이미지로 된 성경인 셈이다.
르네상스 시대가 되면 방주의 외관은 물론 자연과 동물들, 준비하는 인간의 모습도 더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된다. 이탈리아의 화가 야코포 바사노(Jacopo Bassano, 1510〜1592)는 방주로 들어가는 동물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포착했다. 화가의 관심이 방주보다 가지각색의 동물들임을 알 수 있다. 전면에는 소와 나귀, 염소와 양, 닭, 개와 고양이 등의 가축이 엉겨 있다. 중앙에서 이를 지휘하는 노아는 방주를 통해 구원한다는 점에서 그리스도의 원형으로 여겨진다. 방주로 오르는 경사로에는 멧돼지부터 독수리, 사자의 순서로 입장하고 있다. 자세히 보면 쉽게 볼 수 있는 집짐승들은 관찰에 근거해 사실적으로 묘사됐지만, 쉽게 볼 수 없는 들짐승들은 어색하게 표현되기도 했다. 특히 방주에 오르는 사자는 왜소한 데다가 암수 모두 갈기가 달려있다. 16세기에 미대륙의 탐험이 본격화되면서 자연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확대되고 점차 동식물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진다. 아래 비슷한 주제를 담은 17세기, 대 얀 브뤼헐의 그림에서 동물들은 더욱 사실적이고 다양하게 묘사된다. 이전에 언급했듯이 그가 궁정화가로 일하면서 왕가의 희귀한 동물 컬렉션을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아의 세 아들이 여기저기에서 동물들을 인도하고, 노아의 아내와 며느리들도 먹을 양식과 짐을 챙긴다. 오른편 나무와 하늘에도 방주에 오르기 위해 다양한 새들이 모여들고 있다. 집짐승과 들짐승이 모여 있는데도 동물들의 이동은 평화롭게 진행된다. 하늘을 덮은 먹구름으로 화면은 어둡고 곧 비가 내릴 것만 같다. 그래서 대홍수를 대비한 이들의 막바지 준비는 더욱 분주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