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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연희 Jun 27. 2023

3-2. 노아_대홍수의 풍경


하느님의 명령대로 노아는 방주를 짓고 모든 동물들의 암수를 태우고 먹고 마실 양식도 채웠다. 노아가 육백 살 되던 해 비가 내리기 시작하자 노아와 가족들도 방주에 올라탔다. 40일 동안 계속된 비로 세상은 물바다가 되었고, 모든 생명(물론 물고기는 제외겠지만)이 숨을 쉬지 못해 죽게 되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중세의 화가들은 보통 방주와 그 안의 생존자, 즉 노아와 가족, 동물들에 초점을 두었다. 르네상스 시대가 되면 화가들의 관심은 대홍수의 풍경과 대재난을 경험하는 사람들에게로 옮겨간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대홍수>, 1508-12년, 프레스코, 시스티나 예배당, 바티칸


가장 대표적인 예는 시스티나 예배당의 천장을 장식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 1564) <대홍수>다. 여기서는 노아도 방주도 아닌, 하느님이 물로 쓸어버리기를 원했던 타락한 인류가 주인공이다. 비가 계속되며 물이 급속도로 불어나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고지대를 찾아 피신한다. 전면 언덕에 오른 사람들은 아이나 아픈 사람과 동행하며 그들을 돌본다. 그 뒤로 물건과 가재도구를 지고 들고 이고 오는 이들은 세속적인 소유에 대한 집착을 드러낸다. 오른편 바위에도 사람들이 올라가 있는데, 몇몇은 주변에 다치고 아픈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 중앙에 작은 나룻배는 방주를 향해 간다. 몇 명이 헤엄쳐 배에 오르려 하자, 배 안의 사람들이 무자비하게 방망이를 내리치며 밀어낸다. 저 멀리 집처럼 생긴 사각의 방주에는 벌써 여러 사람들이 방주에 들어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사다리를 놓거나 도끼로 내리치려 하지만 절박한 이들의 시도는 성공하기 어려울 것 같다. 그 가운데 방주의 측면에서 하늘을 향해 손짓하는 노아는 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듯하다. 방주 꼭대기 창문에는 하얀 비둘기가 보이는데, 아마도 대홍수 이후 노아가 마른땅을 찾기 위해 날려 보낸 비둘기일 것이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성령 하느님을 암시할 수도 있다.


미켈란젤로는 대홍수라는 자연의 거대한 힘을 강조하기보다 이를 경험하는 사람들의 다양한 반응과 감정에 집중했다. 그가 시스티나 예배당에 그린 다른 인물들처럼, 이들은 대부분 알몸인 데다 근육질의 영웅적인 몸을 가졌다. 어찌할 수 없는 대재난 앞에 인류가 느꼈을 공포와 두려움, 집착과 이기심, 생존을 위한 발버둥과 절박함, 타인을 향한 연민과 자비까지, 인간다움의 모든 것들이 얼굴과 몸짓을 통해 더욱 강렬하게 전달된다. 여기에 악인뿐 아니라 선인과 약자도 등장하기에, 왜 모두 함께 사라져야 하는지 묻고 싶어 질지도 모른다. 신실한 미켈란젤로도 그것을 의도했던 것일까 궁금하다. 그래도 비는 계속되고 혼란 속에서 사람들은 하나둘 죽음을 맞이할 것이며 결국 고요만이 남게 될 것이다.



한스 발둥 그린, <대홍수>, 1516년, 캔버스에 유채, 81.9 x 65.2cm, 밤베르크 역사미술관


한스 발둥 그린(Hans Baldung Grien, 1484〜1545)의 작품은 그야말로 대홍수로 인한 아비규환의 모습을 보여준다. 앙에 보석함 같은 특이한 모양의 방주는 정교한 문양으로 장식되었고, 측면의 문은 자물쇠로 단단히 채워져 있다. 한 남자가 위태롭게 문에 매달려 있고, 방주 하단에도 여러 사람들이 필사적으로 방주를 붙잡고 있다. 계속된 폭우로 물바다가 된 사방에는 남녀노소는 물론 다양한 동물들이 허우적 댄다. 그들에게 방주 꼭대기 창문으로 보이는 새들이 얼마나 부러웠을까. 운 좋게 가구나 도구 등에 의지한 사람들도 있지만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왼쪽에 나무판자 위에 고뇌에 찬 노인에서부터 엄마와 젖먹이, 요람의 아기, 뱃머리로 올라간 갓난아기, 말을 붙잡은 어른들까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한 이들의 몸부림이 처절하다. 대홍수의 비극은 하늘을 뒤덮은 짙은 먹구름과 번쩍이는 번개로 인해 더욱 위협적으로 다가온다.


북유럽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의 제자였던 한스 발둥은 점차 대담한 색채와 뒤틀리고 왜곡된 형태, 세기말적인 상상이 가득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발전시켰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미켈란젤로의 인물들과 다르게 어둡고 추한 모습인데, 이것은 그들의 죄악과 어리석음을 강조한다. 화가의 소년기는 각종 역병과 재난이 터지면서 대다수의 사람들이 1500년에 세상이 종말을 맞을 것이라 믿었던 시대였다. 다행히 세상은 끝나지 않았지만 그는 인간의 추악한 욕망,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죽음, 인생의 덧없음이라는 주제를 계속해서 발전시켰다. 대재난의 참혹한 풍경과 종말을 맞이한 사람들의 공포를 동시에 강조한 <대홍수>는 한스 발둥만의 어둡고 그로테스크한 언어가 돋보인다.


“내가 창조한 사람들을 이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과 기어 다니는 것들과 하늘의 새들까지 쓸어버리겠다. 내가 그것들을 만든 것이 후회스럽구나!” (창 6,7)



터너, <그림자와 어둠 – 대홍수 저녁>와 <빛과 색(괴테의 이론) – 대홍수 이후 아침- 창세기를 쓰고 있는 모세>, 1844년, 78 x 78cm, 테이트, 런던


영국이 사랑하는 국민 화가 조지프 말로드 윌리엄 터너(Joseph Mallord Willam Turner, 1775〜1851)가 그린 대홍수의 풍경은 가히 획기적이다. 휘몰아치는 붓질로 그린 현대적인 추상화 같지만, 제목을 보면 창세기의 대홍수가 주제다. 먼저 왼쪽에 대홍수 저녁 장면을 보자. 어둠 속에서 거대한 폭풍우와 회오리바람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자세히 보면 그 안에 수많은 동물들이 뒤엉켜 있고 하늘에 새 떼도 폭풍우에 휩쓸려 갈 듯하다. 저 멀리 노아의 방주로 향하는 동물들의 흐름도 보인다. 달빛이 비친 평온한 원경의 방주와 대조적인 전면의 어두운 풍경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다. 마치 타락한 세상을 쓸어버리겠다는 하느님의 분노와 의지가 담겨있는 것만 같다.


오른쪽에 대홍수 이후 아침 풍경으로 가보자. 화면에는 마치 빛이 폭발한 듯 하양-금빛-주황-갈색까지 따듯한 빛의 스펙트럼이 펼쳐져 있다. 빛의 소용돌이에는 물에 휩쓸린 수많은 사람들과 함께, 중앙에 죽고 썩어간 생명의 어두운 흔적도 남아있다. 하늘에는 희미하게 펜을 쥔 한 남자가, 그 아래엔 뱀 같은 형상도 눈에 띈다. 제목에서 힌트를 얻자면, 그는 창세기를 쓰고 있는 모세다. 사실 모세는 이보다 한 참 후대에 태어나지만, 창세기의 저자로서 마치 이 장면을 보고 기록하는 것처럼 등장한다. 모세 편에서 다루겠지만 애굽을 탈출하고 광야에서 불평하던 사람들이 하느님이 보낸 불뱀에 물려 전염병에 걸리자, 모세가 장대에 놋뱀(청동으로 만든 뱀)을 걸어놓게 했는데 이를 바라본 사람들은 병이 나았다. 이런 맥락에서 그림 중앙에 묘사된 모세의 놋뱀은 노아를 통한 세상의 재탄생이라는 의미를 더한다. 대재난의 흔적은 여기저기에 남아있지만, 다행히 비는 멈추었고 아주 오랜만에 세상은 빛으로 가득하다.


J. M. W. 터너, <눈보라 - 얕은 바다에서 신호를 보내며 유도등에 따라 항구를 떠나가는 증기선>, 1842년, 122 x 91.5cm

대홍수를 주제로 한 쌍의 그림은 터너의 말년, 70살경의 작품으로, 이 시기를 전후로 그만의 추상적인 풍경화가 나온다. 한 예로 1842년의 작품에 터너가 붙인 제목은 ‘눈보라 - 얕은 바다에서 신호를 보내며 유도등에 따라 항구를 떠나가는 증기선. 나는 에어리얼 호가 하위치 항을 떠나던 밤의 폭풍우 속에 있었다’다. 당시에 이 그림은 “비누 거품과 회반죽 덩어리”라 혹평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실제 바다에서의 눈보라와 파도의 소용돌이 속에서 바라보는 증기선은 이처럼 유동하듯 모호한 형상일 것이다. 터너는 이 장면을 그리기 위해 배의 돛대에 묶여 몇 시간 동안 밤의 폭풍우를 관찰했다고 한다. 대홍수를 주제로 한 위의 그림과 유사한 이 작품은 순간이 아닌 움직임과 시간을 담고 있으며, 눈으로만 본 것이 아닌 온몸으로 감각/경험한 풍경이라는 점에서 혁신적이다. 평생 대자연의 거대한 위력과 대재난의 풍경에 매혹을 느꼈던 터너는 그만의 시선과 표현으로 낭만주의 풍경화의 정점을 보여주었다.  


“나는 이해할 수 있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나는 한 풍경이 어떻게 보이는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터너


이발사 아버지에 정신이상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터너는 14살에 왕립 아카데미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해 20대에 벌써 능력을 인정받으며 경제적 성공과 명성을 누렸고, 하위 장르였던 풍경화를 자신만의 시각과 언어로 표현하며 풍경화의 수준과 표현력을 확장했던 노력파 천재였다. 그가 살았던 18, 9세기의 영국은 산업화로 도시가 급변하고 철도의 개통으로 대중들의 여행이 확장되던 시기다. 터너 또한 그림의 소재를 찾아 평생 여행을 다녔다. 그는 특히 산과 협곡, 폭포 등의 거대한 자연경관에 매료되었고, 수채화 드로잉으로 실력을 쌓으며 당시 유행하던 여행 기념책자에 삽화를 그리기도 했다. 여행 중에 그는 평생의 멘토가 되는 17세기의 화가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1600~ 1682)의 풍경화를 만났는데, 특히 그 안에 황금빛 태양과 주변에 스며든 따뜻한 빛의 효과에 완전히 매료된다. 터너는 빛을 표현하기 위해 이전에 보조색으로 사용되던 흰색을 단독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캔버스의 밑바탕도 기존과 다르게 밝게 칠해 화면이 더 환한 빛을 품게 되었다. 1820년을 전후로 터너의 양식은 점차 전통적인 풍경화에서 벗어나 표현적이고 낭만적인 경향으로 변해간다. 화재나 눈보라, 폭풍우 등을 주제로 한 1830년대의 풍경화는 환경과 날씨, 빛에 따라 변화하는 대기와 색채의 효과로 점차 추상화된다. 게다가 그는 1840년대부터 괴테(1749~1832)의 색채론에 기반한 빛과 색채에 대한 연구를 심화했다.


창세기의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 이야기를 정확하게 묘사하는 것은 터너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그가 제목에 아예 ‘빛과 색(괴테의 이론)’을 명시했듯이, 괴테의 이론을 적용해 보기 위해 대홍수의 시작과 이후의 풍경을 선택한 것에 가깝다. 괴테는 대상과 환경 자체의 색보다 그것을 비추는 빛과 어둠에 주목했고, 시각과 감각을 통해 각 색채가 전하는 감정을 크게 행복(plus)과 불안(minus)으로 분류했다. 물론 터너는 대홍수 이후의 장면에 행복과 관계된 노랑, 빨강을 더 많이 활용하여 탄생과 희망의 분위기를 담았다. 빠른 붓질로 담아낸 모호한 풍경이지만 대비된 색채를 활용한 터너의 두 작품은 자연의 원초적인 힘과 에너지는 물론 풍경이 선사하는 감정을 전달하는데 목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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