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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연희 Jul 03. 2023

3-3. 노아_새로운 세상의 통로

 : 무지개 언약과 만취한 노아


하느님이 노아와 방주의 동물들을 기억하셔서 하늘의 창문들이 닫히고 비가 멎었다. 대홍수가 끝난 그다음 날을 유일무이한 시선으로 담아낸 그림이 있다. 앞서 살펴본 터너보다 한 세대 이후, 같은 런던에서 태어난 조지 프레데릭 와츠(George Frederic Watts, 1817-1904)<대홍수 이후, 41일째>다.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화면 가득 빛과 열기를 내뿜는 태양뿐이다. 어디에도 노아나 방주, 그가 날려 보낸 비둘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광경은 누구의 눈을 통해 바라본 것일까? 억수로 쏟아지는 빗소리가 그치자 비가 정말 멈춘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 노아는 방주 꼭대기로 올라가 처음으로 창문을 열어보았다. 오랜만에 마주한 불타오르는 태양의 광휘와 열기는 그야말로 대단했다. 한 달 넘게 비를 내렸던 구름들도 힘을 잃고 밀려난다. 사방으로 빛을 뻗치는 태양은 손에 잡힐듯하고 저 멀리 수평선은 낮게 펼쳐져 있다. 하단의 붉은 띠는 노아가 내다본 방주의 창틀일 것이다. 태양의 열기 때문인지 온 세상을 쓸어버린 물은 노란색과 초록빛을 띠고 있다. 계속 바라보면 물은 어느새 증발하고 벌써 여기저기에서 초록 생명들이 태양의 에너지를 받아 움트는 것처럼 보인다. 오랜만에 햇살 가득한 광경을 마주한 노아의 심경은 어땠을까.


조지 프레데릭 와츠, <대홍수 이후, 41일째>, 1886-91년, 캔버스에 유채, 142.2 × 111.8cm, 와츠갤러리, 영국 콤튼


조지 프레데릭 와츠는 유년기 때 두 형제와 어머니의 죽음을 경험했고, 악기 제조업자였던 아버지의 엄격한 가정교육 속에서 자랐다. 병약한 몸과 마음으로 어두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지만, 18세에 왕립 아카데미에 들어가 비교적 빠른 나이에 초상화가로 자리 잡으며 미술계에서도 인정받았다. 청년 시절 이탈리아 여행에서 고대와 이탈리아 예술에 매료되어 점차 성서나 신화를 주제로 한 역사화와 알레고리도 다루었다. 와츠가 살았던 영국은 산업혁명의 결과로 눈부시게 발전한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다. 영국의 황금기인 빅토리아 시대(1837~1901)를 살았던 화가는 당대의 물질만능주의와 타락을 비판적으로 바라보았고, 신이 타락한 세상을 물로 심판한 대홍수 이야기에 이끌려 이 주제를 여러 번 다루었다.


터너처럼 70살경에 그리고 미완성인 채로 전시(1886)되었을 때, 이 작품의 제목은 단순히 <태양>이었다. 그런데 이후 와츠가 5년에 걸쳐 그림을 보완하면서, 창세기의 대홍수와 노아의 맥락 속에 위치시켰다. 그래서 특별히 40일의 대홍수가 끝난 다음 날 노아가 창문을 열었을 때 본 바로 그 태양이 된 것이다. 작열하는 이 태양은 모든 만물을 소생시키는 근원이자 능력이며, 신이 세상을 다시 감싸는 사랑이자 용서를 상징하고, 인류의 또 다른 시작과 희망을 이야기한다. 와츠가 “나는 사물(thing)이 아니라 생각(idea)을 그린다”라고 말한 것처럼, 최소한의 언어로 다양한 의미를 전하고 있다. 이 작품은 와츠의 남다른 시선과 몇 년간 수정하며 축적된 태양의 에너지 때문인지, 노아와 관련된 그림들 가운데 가장 인상 깊게 남아있다.


“빛과 열기의 초월적인 힘이 갑자기 재창조를 시작한다.

어둠은 쫓겨나고 물은 더 높은 법에 순종해 벌써 수증기로 흩어지고 지구 표면에서 빠져나간다.”  

- 와츠의 글로 여겨지는 1891년 뉴 갤러리 전시 설명


시몽 드 밀, <아라랏산의 노아의 방주>, 1570년, 패널에 유채, 114 x 142cm, 개인 소장


시몽 드 밀(Simon de Myle, 1568-1625)의 그림은 물이 빠지고 아라랏산에 정박한 방주에서 동물들이 하늘로, 땅으로 흩어지는 장관을 보여준다. 거대한 배 위에 집이 얹힌 방주는 노아의 가족과 동물들이 지낼 만큼 그럴싸해 보인다. 방주에 머물렀던 새들이 하늘로 날아오르고, 갑판에 유니콘과 순록, 기린도 내려갈 채비를 한다. 노아와 아들들은 L자 모양의 판을 따라 내려오는 동물들을 곳곳에서 인도하고, 노아의 아내와 며느리들은 마른땅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다. 초록빛 대지에는 커다란 코끼리부터 멧돼지, 사자, 닭, 고양이와 낙타까지 가지각색의 동물들이 오랜만의 산책을 즐긴다. 당시 사람들이 실제 존재한다고 믿었던 유니콘과 그리핀(사자의 몸에 독수리의 얼굴과 날개를 지닌 상상의 동물)도 등장하는 것이 흥미롭다. 왼쪽 중경에 코뿔소는 마치 갑옷을 입은 것처럼 묘사되었는데, 실제로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시중에 떠돌던 판화를 참고했기 때문이다. 화가는 보고 듣고 상상하는 가능한 한 많은 동물들을 등장시켰다. 전경에는 사자가 하얀 말의 배를 무자비하게 잡아 뜯고 있다. 약육강식을 보여주는 이 모티프는 대홍수 이후에도 폭력과 죄악이 계속될 것임을 암시한다.


플랑드르 출신의 시몽 드 밀은 알려진 게 거의 없는 화가이지만 이 작품에 자신의 창안(inventor)으로 그렸음을 명시하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화가는 물이 빠지고 하느님이 노아에게 “모든 생물들, 너와 함께 있는 모든 살덩어리들, 곧 새와 짐승과 땅을 기어 다니는 모든 것을 데리고 나와라. 그래서 그것들이 땅에 우글거리며 번식하고 번성하게 하여라.”(창 8, 16-17)라고 한 말을 아주 실감 나게 이미지로 번역했다. 물론 거대한 방주와 다채로운 동물들을 볼 수 있는 재미는 덤이다.



'대홍수와 노아의 방주' 연작, 13세기, 서쪽 나르텍스의 남쪽 배럴 볼트, 산 마르코 대성당, 베네치아


위의 세부

베네치아의 랜드마크산 마르코 성당(Basilica of San Marco, 11C)은 내부가 성경의 이야기와 성인들을 묘사한 황금빛 모자이크로 장식되어 있다. 성당 정문 입구와 본당 사이(나르텍스)에 묘사된 노아 연작은 오른쪽 둥근 지붕(큐폴라)을 장식한 천지창조 장면과 함께 이야기 전개와 표현력이 뛰어나다. 만화책처럼 구성된 노아 연작은 이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커튼처럼 비가 내리고 대홍수로 시체가 물에 둥둥 떠 있는 장면을 시작으로, 그 옆에 비가 멈추자 노아가 비둘기를 날려 보낸다. 비둘기가 나뭇가지를 물고 돌아오자, 이어진 장면에서 노아와 가족들이 방주에서 동물들을 땅에 내리고 있다. 세로로 확장된 이 장면에서는 하단에 뛰노는 암수 동물들뿐만 아니라 방주를 감싼 무지개가 눈에 띈다. 노아가 땅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맨 아랫단에서와 같이 제단을 쌓고 동물을 잡아 번제를 드린 것이다. 하느님은 향내를 기뻐 받으시고, 모든 동물들을 인간의 손에 맡기며 양식으로도 허용하셨다. 그리고 노아와 가족들, 모든 동물들에게 다시는 땅이나 생명을 멸망시키는 홍수를 일으키지 않겠다고 계약을 세우고, 계약의 표징으로 구름 사이에 무지개를 두셨다. 즉 세부 장면은 계약 전과 후의 장면이 결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결국 방주비둘기, 무지개는 창세기의 대홍수 이야기를 함축하는 모티프로 자리 잡게 된다.


‘사람의 마음은 어려서부터 악한 뜻을 품기 마련, 내가 다시는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으리라. 이번에 한 것처럼 다시는 어떤 생물도 파멸시키지 않으리라. 땅이 있는 한 씨 뿌리기와 거두기,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이 그치지 않으리라’ (창 8, 21-22)


땅에 정착해 포도 농사를 지었던 노아는 어느 날 포도주에 취해 벌거벗은 채로 천막에 누워있었다. 그런데 둘째 아들 함이 아버지의 알몸을 보고 형제들에게 떠벌린다. 반면 셈과 야펫(야벳)은 뒷걸음치며 들어가 옷으로 아버지를 덮어드렸다. 이후에 이를 알게 된 노아가 함의 아들 가나안을 저주하는 것으로 노아의 이야기는 마무리된다.


조반니 벨리니, <만취한 노아>, 1515년, 캔버스에 유채, 103 × 157cm, 브장송 미술관, 프랑스


술 취한 노아와 함의 조롱은 의외로 여러 화가들이 다루었는데, 그 가운데 베네치아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화가 조반니 벨리니(Giovanni Bellini, 1430〜1516)의 작품이 단연 돋보인다. 흰 수염이 덥수룩한 노아는 벌거벗은 채로 화면을 향해 누워 곯아떨어졌다. 포도밭을 배경으로 노아의 머리맡에 놓인 탐스러운 포도와 전경의 빈 컵은 그가 포도주에 취했음을 말해준다. 세 아들이 주변에 모여있는데, 중앙에 함은 아버지를 내려다보면서 조롱하듯 웃고 있다. 히브리어로 ‘알몸을 본다’는 표현은 ‘성행위를 하다’를 뜻하기도 해서, 이 일화는 함이 성적 희롱을 저지른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양쪽에 셈과 야펫은 눈길을 돌려 아버지의 몸을 분홍천으로 가리고 있는데, 가운데 함은 형제들을 두 손으로 만류하고 있다. 이후에 노아는 이 사실을 알고 자기를 욕되게 한 함에게 “가나안(함의 아들)은 저주를 받으리라. 그는 제 형제들의 가장 천한 종이 되리라”(창 9, 25)라고 말한다. 반면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예를 지켰던 셈과 야펫은 그에 합당한 축복과 유산을 받게 된다. 이후 노아의 세 아들을 통해서 온 땅으로 사람들이 퍼져나갔는데, 함은 유대민족과 적대적이었던 가나안과 애굽의 조상이 된다. 큰 아들 셈은 유대민족이 속했던 팔레스티나와 메소포타미아 지방을 차지하고, 야펫은 그리스와 해변지역에서 번성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노아의 저주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과 대치했던 가나안 사람들의 기원을 설명한다.


벨리니가 말년에 그린 <만취한 노아>는 노년에 대한 화가의 불만이 반영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 베네치아에서 잘 나가는 대가라도 외모와 체력이 저물고 손과 행동도 어눌해지는 노년은 고뇌로 다가왔던 것일까. 그래도 단단한 몸과 반짝이는 수염을 가진 노령의 노아는 평온한 얼굴로 잠들어 있다. 화면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두 아들이 아버지의 알몸을 가려주는 분홍색 천이다. 벨리니가 즐겨 사용했던 그만의 부드러운 핑크색은 '벨리니'라는 스파클링 와인 칵테일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이 작품은 베네치아의 대표적인 색채 화가 벨리니의 원숙한 채색과 물기를 머금은 노을빛까지도 스며들어있다.


타락한 세상의 유일한 의인 노아의 말년에 일어난 이 일들은 뭔가 인간적이면서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 있다. 영화 <노아>(2014)의 감독 대런 아로노프스키는 노아라는 전설적인 인물을 이해하는데, 특히 홍수 후 그의 행동에 주목했다고 한다. 제사를 지내고 포도를 재배하고 진탕 취했던 노령의 노아. 어쩌면 세상의 파멸을 목격하고 자기 가족만 살아남아 풍요를 누렸던 죄책감이 그를 외로운 술꾼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노아의 아버지는 거친 세상에서 ‘수고하고 고생하는 우리를 위로해’(창 5, 29)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아들의 이름을 지었다. (나도 그 마음으로 새로 지은 우리 집을 노아**라 지었다.) 노아는 이름이 의미하듯 ‘위로’와 ‘휴식’을 주는 포도주도 인류에게 선사했다.


대홍수 이야기는 신의 분노와 심판이라는 멸망으로 막을 내리지 않는다. 의롭고 흠 없는 노아를 통해 세상은 재창조되지만, 인류에게는 여전히 죄악의 불씨가 남아 있다. 현대를 살아가면서도 미디어를 통해 만나는 세상은 어둡고 역겨울 정도로 절망스럽게 느껴질 때도 있다. 하지만 노아와 같은 의로운 이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그리고 말도 안 되는 명령을 듣고 따를 믿음이 그에게 있다면, 세상엔 희망이 있다는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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