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브라함과 세 천사
한 손에 칼을 쥔 노인이 두 팔을 들고 하늘을 바라고 있다. 그의 좌측엔 덤불에 걸린 숫양이, 우측엔 한 소년이 결박당한 채 제단 위에 무릎을 꿇고 있다. 소년의 얼굴 주변에 후광과 그 위에 가장 크게 빛나는 별이 눈에 띈다. 군청색으로 물든 아름다운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이 반짝인다.
이미지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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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교와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에서 모두 믿음의 조상으로 추앙받고 있는 아브라함은 어떤 인물일까. 창세기 12장부터 전개되는 ‘역사 시대’를 여는 아브라함은 노아의 아들 셈의 후손이며, 기원전 20세기 전후의 인물로 추정된다. 그의 원래 이름은 존귀한 아버지를 의미하는 ‘아브람(Abram)’이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에 번성한 도시 우르(Ur) 출신으로 그곳에서 사라이(사래, Sarai)와 결혼했다. 이야기는 아버지 테라(데라)가 두 아들과 며느리, 손자를 데리고 우르를 떠나는 것으로 시작한다. 대가족이 북서쪽에 위치한 하란에 정착해 잘 살고 있는데 늘그막의 아브람에게 하느님이 말씀하신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창 12, 1-2)
아브람의 나이 75세였고, 사라이는 불임이어서 그들에겐 자식이 없었다. 하느님이 이르신 대로 아브람은 익숙한 삶과 공동체를 떠나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길을 떠났다. 그는 지혜롭고 용감하며 공의로운 자였지만 나약한 면모도 있었다. 가던 길에 가나안의 기근으로 이집트로 향했을 때 자기 목숨을 부지하고자 미모의 아내를 누이로 속여, 사라이가 파라오의 처소에 들어가는 일도 있었다. 가나안으로 돌아와 동행한 조카 롯과 각자의 가축 때문에 함께 생활하기 버거워지자, 롯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어 땅을 차지하게 했다. 이후에 전쟁 포로가 된 롯을 구하기 위해 달려가 싸웠으며, 자기 몫이 아닌 것에 욕심을 내지 않고 사제에게 십일조를 바쳤다. 아브람은 하느님의 벗이라고 불릴 정도로(2 역대 20, 7) 하느님의 목소리를 자주 들었다. 그때마다 거주할 땅과 수많은 자손을 약속받았고, 그는 믿음으로 어디를 가든 주님을 위해 제단을 쌓았다. 위의 그림을 다시 보면, 셀 수 없는 하늘의 (모두가 다르게 빛나는) 별만큼 후손을 주신다는 하느님의 언약이 담겨있음을 알 수 있다.
“하늘을 쳐다보아라. 네가 셀 수 있거든 저 별들을 세어 보아라. 너의 후손이 저렇게 많아질 것이다.” (창 15, 5)
그럼에도 불안했던 아내 사라이의 권유로 아브람은 여종 하가르(하갈)와 동침하여 86살에 아들 이스마엘을 보았다. 이제 백 살을 바라보는 아브람에게 하느님은 많은 민족들의 아버지를 의미하는 ‘아브라함(Abraham)’이라는 새 이름을 주신다(창 17, 5-6). 사라이도 여러 민족들의 어머니를 의미하는 ‘사라(Sarah)’가 된다. 더불어 그들의 후손에게도 이 가나안 땅을 주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어 주겠다고 아브라함과 계약하시며 그 표징으로 할례를 명하셨다. 하지만 노부부에게 자식이 생겨 열국의 조상이 된다는 이야기는 아브라함을 웃음 짓게 했다. 하느님의 계약은 웃음을 의미하는 사라의 아들 ‘이사악(이삭 Issac)’과 세워진 것이었다.
어느 날 마므레의 참나무(상수리나무)들 곁에서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실제로 나타나셨다(창 18, 1). 하지만 한창 더운 대낮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본 것은 ‘낯선 세 사람’이었다. 고대 유목 사회에서 낯선 여행자는 위험한 존재일 수도 있지만, 아브라함은 달려가 땅에 엎드려 그들을 맞아들이며 극진히 대접했다. 사라에게는 빵을 굽게 하고 하인에게는 송아지를 잡아 요리하게 하여 엉긴 젖과 우유와 함께 차려 낸다. 그들이 내년에 사라가 아이를 낳을 것이라 말하자, 이번엔 천막 어귀에서 그녀가 웃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의심을 책망하며 내년에 아들이 태어날 것을 확언한다(창 18, 13-15).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는 이 에피소드를 손만 한 작은 캔버스에 담았다. 참나무 그늘에서 세 천사는 정말 편히 쉬고 있다. 더러운 발과 허름한 차림의 작은 두 천사는 허기를 채우고, 중앙에 하얀 옷의 천사는 발을 뻗고 앉았다. 옆에 몸을 낮춘 아브라함은 발을 씻을 물을 막 따르려던 참이다. 그들은 아브라함 눈에 낯선 여행자였지만, 성경에서 주님으로 묘사되었다. 그리스도교 교부들은 삼위일체인 하느님과 연관 지었고, 네덜란드에서 1637년에 나온 주석서에는 하느님과 두 천사로 해석했다. 그래서 보통 천사로 묘사되었고, 성부를 나타내는 천사는 더 크고 위엄 있게 그려지기도 했다. 여기서도 중앙에 날개를 펴고 편하게 앉아 있는 천사는 몸집도 크고 홀로 눈부신 광채를 발하고 있다. 그는 아브라함에게 사라가 어디 있는지 물으며 축복한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창 18:10) 이 말을 듣고 멈칫한 아브라함은 서서히 신성한 이들의 존재를 깨닫고 있다. 뒤쪽 문가에 선, 90살에 가까운 사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속으로 웃는다. 그녀는 여전히 어둠 속에 있다.
렘브란트는 성경의 이야기 가운데서도 하느님이 자신을 드러내신 계시(啓示, revelation)의 순간을 묘사하는데 관심이 많았다. 그때마다 어둠 속의 빛을 활용하였고, 점차 극적인 움직임보다는 고요함 가운데 깨우치는 인식의 변화를 포착했다. 이 작은 그림은 사적인 공간의 책상이나 선반에 놓여 관자에게 친밀한 묵상을 이끌었을 것이다. 아브라함이 하느님의 계시를 천천히 깨달았듯이, 보는 이에 따라 다른 메시지를 읽어낼 수 있다. 일상에서 만나는 낯선 이라도 내 몸처럼 여기고 대접하면 우리를 변화시키는 신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것, 나는 그 해석이 마음에 와닿는다.
렘브란트 말년의 제자였던 아렌트 더 헬더르(Arent de Gelder, 1645~1727)는 이 주제를 비교적 큰 캔버스에 스승과 다르게 묘사했다. 어둑한 천막 안 식탁에 둘러앉은 세 천사는 신적인 자태와 부드러움으로 화면을 가득 채운다. 여기서도 흰머리와 수염에, 하얀 두루마리와 금빛의 망토를 걸친 가운데 인물이 성부 하느님임을 알 수 있다. 날개는 없지만 신성함을 나타내는 후광처럼 그의 몸에서 광채가 퍼져나간다. 하느님은 두 손으로 축복을 내리며 일 년 후 아들 이사악의 탄생을 예언하고 있다. 좌우에 차분히 앉아 있는 두 천사도 아브라함을 향해 있다. 오른쪽 천사는 칼을 쥐고 있는데, 장차 아브라함에게 일어날 일을 암시하는 것 같다. 사실 붉은 옷차림의 아브라함은 거의 존재감이 없다. 자그마한 몸집에 머리도 숭숭한 그는 마치 하인처럼 시중을 들고 있다. 식탁 위의 송아지 고기와 반짝거리는 유리잔, 앞쪽에 놓인 고풍스러운 물병과 납작한 빵은 세밀하게 묘사되어 만져질 듯하다. 아렌트의 그림 앞에 서면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실물 크기의 세 인물을 마주하게 된다. 우리의 눈에 따라 그들은 낯선 여행자일수도, 아니면 신성한 존재일 수도 있다. 아브라함의 시선으로 본다면, 마치 나를 축복하시는 듯한 하느님의 환상적인 현존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이 그림의 장점이다.
한 세기 후 베네치아의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 1696~1770)는 보다 역동적인 방식으로 아브라함과 세 천사를 묘사했다. 하늘에서 천사들이 막 아브라함에게 임하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다. 구름을 몰고 온 세 천사는 위엄 있는 자세와 분위기로 화면을 압도한다. 아주 낮은 시점에서 본 장면이라 더 극적이다. 뒤쪽에 허름한 차림에 막대기를 든 천사는 나그네처럼 보이고, 오른쪽 구름 위에 천사는 아름다운 날개의 뒤태를 보여준다. 무엇보다 바위 위에 우뚝 선 중앙의 천사가 화면의 구성을 지배한다. 위로 봉긋 솟은 날개에 하얀 피부와 아름다운 몸을 가진 천사는 잘생긴 데다 거만해 보이기까지 한다. 전 세계 안료 무역의 중심지인 데다가 화려한 귀족 문화가 발달한 베네치아에서 천사들은 더 다채로운 색감의 의복을 걸쳤고 외모도 더 귀족적이다. 반면 눈이 거의 감긴 아브라함은 몸을 낮추고 두 손을 모은 자세로 공경심을 드러낸다.
베네치아의 교회와 궁정을 장식하는 역사화를 주로 그렸던 티에폴로는 말년에 마드리드 궁정에서 일하다가 생을 마감했다. 이 작품은 주문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지만, 개인 채플이나 사적인 기도를 위한 공간을 장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화가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여행자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에 집중하지 않았다. 오른쪽 전면에 천위에 놓인 빵은 소박하기 그지없다. 사라조차 등장하기 않아 그녀가 아들을 낳게 될 것이라는 예언이나 암시도 잘 드러나지 않는다. 아름다운 색채와 빛이 스며들어 있는 이 그림에서 이상하게 눈길을 끌었던 것은 천사가 저 멀리 가리킨 손가락이었다. 아브라함의 생을 떠올려 보면, 그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따라서 끊임없이 떠났다. 노년의 그에게 하느님이 약속한 땅과 후손에 대한 축복은 아리송하기도 했지만, 결국 아브라함은 믿고 감사함으로 제단을 쌓았다. 이 그림은 새로운 삶으로의 부르심을 따르는 아브라함의 순종과 믿음을 보다 상징적으로 전달한다.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의 <아브라함과 세 천사>는 샤갈이 말년에 그린 대형 유화 '성서 메시지 연작' 가운데 하나다. 화면 중앙에 천사들이 식탁에 둘러앉아 음식을 즐기고, 사라와 아브라함은 음식을 나르며 시중을 들고 있다. 이 그림은 독특하게 선홍색의 대지를 배경으로 하는 데다가 천사들을 마주 보도록 묘사하지 않았다. 흰색과 보라, 파란 옷을 입은 천사들은 가냘픈 실루엣에 아름다운 날개가 돋보인다. 오른쪽에 노란 날개와 후광까지 있는 파란 옷의 천사는 성부 하느님일 것이다. 가운데 천사는 여행길이 고됐는지 퉁퉁 부은 한쪽 발의 신발을 벗고 있다. 인간적인 특징이 드러난 이 천사는 성자, 흰옷을 입은 천사는 당연히 성령을 나타낼 것이다. 뒤쪽에 사건의 배경인 푸른 참나무 숲이 보인다. 뒤쪽 중앙에는 평생 하느님의 (손이) 이끄심을 따라 떠난 아브라함의 여정이 묘사되었다. 오른쪽 동그란 구 안에는 세 천사가 아브라함을 부추겨 걷는 모습이 보인다. 이후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예시하는 것이다.
이곳 소돔에서 조카 롯이 거주하는 소돔과 고모라에서 원성이 커지고 죄악이 무거워 주님이 그곳을 쓸어버리려 하자, 아브라함은 주님의 공정하심을 내세우며 의인이 50, 45, 40.... 10명만 있어도 멸하시지 않도록 하느님을 설득했다. 아브라함처럼 롯도 그곳에 방문한 두 나그네(천사)를 극진히 대접했는데, 소돔의 모든 남자들이 몰려와 이방인에게 성적인 폭력을 가하려고 했다. 이곳 소돔에서 남색(sodomy)이라는 단어가 유래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방인을 지키기 위해 이상하게도 롯이 딸을 내어주려고까지 했던 것도, 다행히 천사의 도움으로 롯의 가족이 대피했지만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따르지 않았던 롯의 부인이 소금기둥이 된 것도, 지금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롯의 두 딸이 대를 잇기 위해 아버지를 술에 취하게 해 자식을 보았다는 이야기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롯과 관련된 그림은 여기서 제외했지만 각각의 사건은 역사적, 문화적, 상징적 맥락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
샤갈이 천사를 대접하는 이 장면의 배경으로 붉은색을 선택한 것이 처음엔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샤갈이 초기부터 자주 사용했던 붉은색은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되었다. 러시아에 대한 향수나 유대인에 대한 형제애, 삶에 대한 애착을 표현하기도, 때에 따라서는 내적 갈등이나 혼돈을 드러내기도 했다. 단순하게 샤갈은 땅과 흙의 색으로 붉은색을 사용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을 암시한 맥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아브라함이 낯선 이방인을 하느님이 보낸 천사처럼 극진히 대접했던 것과 소돔과 고모라에서 외지인에게 폭력을 가해 욕망을 채우려는 것이 대조되기 때문이다. 요하임 파티나르(Joachim Patinir, 1480~1524)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이 있는 풍경>에서 유황과 불로 사라져 가는 선홍빛 도시 풍경을 보면 더 확실해진다. 즉, 샤갈의 그림에서 하느님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혼란한 세상에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셨고, 그가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창 18, 19)함으로써 열방을 회복하고자 하셨다.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여기는 종교에서 나그네를 ‘반갑게 맞아 정성껏 후하게 대접’하는 환대(歡待, hospitality)는 매우 중요한 가치였다. 약자를 돌보고 이방인을 사랑하는 것이야 말로 하느님이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임을 신명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주 너희 하느님은 신들의 신이시고 주님들의 주님이시며,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시고 뇌물도 받지 않으시는, 위대하고 힘세며 경외로우신 하느님이시다. 또한 그분은 고아와 과부의 권리를 되찾아 주시고, 이방인을 사랑하시어 그에게 음식과 옷을 주시는 분이시다. 너희는 이방인을 사랑해야 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이방인이었기 때문이다.” (신 10, 17-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