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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연희 Jul 25. 2023

4-2. 아브라함과 이사악_믿음과 순종의 조상

: 이사악의 희생


조반니 프란체스코 구에르치노, <하가르와 이스마엘의 추방>, 1658년, 캔버스에 유채, 115 x 152cm, 브레라 미술관, 밀라노

하느님이 말씀하신 대로 아브라함이 백 살이 되었을 때 사라는 귀한 아들을 낳았다. 이사악은 이름대로 부부에게 웃음과 기쁨을 주었다. 어느 날 사라는 이스마엘과 이사악이 노는 것을 보고 아들의 유산이 줄어들 것을 염려해 아브라함에게 여종 하가르와 이스마엘을 내보내기를 청한다. 사실 하가르는 임신했을 때 사라의 구박에 못 이겨 사막으로 도망친 적도 있었다(창 16, 6). 아브라함은 무척 언짢았지만 사라의 말대로 들어주라는 하느님의 명을 따른다. 하가르는 광야에서 길을 헤매다 물이 떨어지자 이스마엘을 뉘어놓고 소리 내어 울었다. 이에 하느님이 보낸 천사는 그 아이도 큰 민족이 될 것이라 약속하며 우물을 보이게 해 주었다.  




“너의 아들, 네가 사랑하는 외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그곳, 내가 너에게 일러 주는 산에서 그를 나에게 번제물로 바쳐라.” (창 22, 2)


마르크 샤갈, <제사를 드리러 가는 길의 아브라함과 이사악>, 1931년, 종이에 구아슈와 유채, 62 x 48cm

아브라함은 여전히 나그네살이하였다. 어느 날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들 이사악을 데리고 가서 그를 번제물로 바치라고 명하셨다. 아브라함은 아침 일찍 번제물을 사를 장작을 팬 뒤, 나귀를 끌고 두 하인과 이사악을 데리고 길을 떠났다. 사흘째 되는 날 아브라함이 눈을 들자 그곳을 볼 수 있었다. 하인들에게 나귀와 머무르게 하고, 아브라함은 장작을 이사악에게 지우고 손에 불과 칼을 들고 함께 걸어갔다. 이 장면을 묘사한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의 성서 삽화는 역시나 시적이다. 악몽과도 같은 명령에 아브라함은 차마 눈도 뜨지 못하고 묵묵히 걸어간다. 맨몸에 커다란 장작 꾸러미를 이고 가는 이사악도 힘겨워 보인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부인 아우구스티누스(354~430)는 장작을 지고 가는 이삭을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는 예수와 연결시켰다. 부자의 마음은 배경처럼 깜깜 할 텐데, 함께 걷는 그들의 모습에서는 이상하게 평온함마저 느껴진다. 이사악은 곧 아버지에게 물을 것이다. “불과 장작은 여기 있는데, 번제물로 바칠 양은 어디 있습니까?” “애야, 번제물로 바칠 양은 하느님께서 손수 마련하실 거란다.”(창 22:7-8)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아버지에 대한 깊은 순종이 이 그림에 스며들어 있다. 둘은 한마음이었다.


그곳에 이르러 아브라함은 제단을 쌓고 장작을 얹어 놓은 다음, 이사악을 묶어 그 위에 올려놓았다. 아브라함이 칼로 아들을 죽이려는 순간,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그를 부르며 아이에게 손대지 말라고 명한다.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이 있었고, 아들 대신 숫양을 번제물로 바쳤다. 현대인의 상식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 사건은 여러 질문을 불러온다. 고대 문명에서는 풍년을 기원하며 인신공양이 행해졌고, 구약의 가나안에서 광신적인 사람들은 맏아들을 신에게 바치기도 했던 시대였다. 그런데 의로우신 하느님이 왜 그렇게 비윤리적인 명령을 내리셨을까? 아무리 신에게 순종한다지만 자식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선택이 옳은가? 이런 질문에 앞서 사건을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이것이 신의 ‘시험(test)’이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시험에는 목적이 있고 시험을 통해 당사자는 변모하게 된다. 성경에서 하느님의 시험을 받았던 인물은 구약의 아브라함과 욥, 신약의 예수까지, 모두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아담과 하와 이래로 카인과 아벨, 노아와 대홍수에서 바벨탑까지, 하느님의 은총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타락과 죄악은 계속 증폭되었다. 하느님은 다시 한번 한 명의 의인을 선택하신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셨고, 그 시험을 통해 그의 믿음은 한층 더 굳건해졌다. 사실 성경이나 교회의 설교에서 이 사건의 초점은 온통 아브라함에게 집중되었는데, 이를 소재로 한 그림들의 제목이 “이사악의 희생”인 것이 오랫동안 이해되지 않았다. 이사악은 이상한 낌새에 아버지에게 물었고, 이후 희생 제사를 준비하는 동안 자기가 번제물이 되리란 걸 알게 되었을 것이다. 성경은 이사악을 ‘아이’로 번역했지만, 히브리어 원문은 ‘건장한 청년’이라고 한다. 즉 10-20대의 이사악이 저항하고자 했다면 노년인 아브라함의 제압쯤은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질문과 논의들은 유다 전승이나 그리스도교 교부들의 해석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성경에서는 이사악의 반응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그는 하느님의 명령을 알았고 자신이 스스로 제물이 되기를 선택했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가장 극적인 이 이야기는 많은 화가들에게 영감을 주었다. 물론 대부분이 아버지가 아들을 죽이려는 절정의 순간을 포착했지만, 초점에 따라 미묘하게 다른 이야기를 전달한다.      



티치아노, <이사악의 희생>, 1542-4년 캔버스에 유채, 328 x 285 cm,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 베네치아


베네치아의 대가 티치아노(Tiziano Vecellio, 1488?∼1576)의 작품은 앞서 살펴본 <카인의 살해>와 함께 성당 천장을 장식하기 위해 그려져, 아래에서 본 시점에서 묘사되었다. 아브라함이 제단 위에 올라간 이사악의 머리를 한 손으로 내리누르고 긴 칼로 내리치려는 순간, 주님의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그를 부른다. 어둑한 하늘 아래 아브라함의 육중한 몸과 근육이 두드러지는 데다가 펄럭이는 옷주름으로 인해 극적인 분위기가 더해진다. 반면 제단 위에서 무릎을 꿇고 아래쪽을 바라보는 이사악의 천진난만한 얼굴은 보는 이의 마음을 더욱 애처롭게 만든다. 왼쪽 위 천사에서부터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연결되는 사선의 흐름 끝에는 가시덤불에 걸린 숫양이 보인다. 하느님이 이사악 대신에 미리 마련해 주신(‘야훼 이레’, 창, 22, 14) 제물인 것이다.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은 가시면류관을 쓰고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위해 선택하신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될 만큼 믿음이 강했다. 시험은 다행히 끝났다.


“그 아이에게 손대지 마라. 그에게 아무 해도 입히지 마라. 네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나를 위하여 아끼지 않았으니, 네가 하느님을 경외하는 줄을 이제 내가 알았다”(창 22, 12)



카라바조, <이사악의 희생>, 1603년 캔버스에 유채, 104 x 135cm 우피치 미술관, 피렌체


바로크 미술의 두 대가 카라바조와 렘브란트는 이 사건을 소재로 한 가장 유명한 걸작을 남겼다. 먼저, 로마에서 활동하며 바로크의 문을 열었던 카바라조(Michelangelo da Caravaggio, 1571~1610)의 작품을 보자. 아브라함은 한 손으로 이사악의 목을 단단히 고정하고 날카로운 단도로 아들의 목을 막 그을 참이다. 의심이 현실로 다가오자 이사악은 두려움과 공포로 비명을 지른다. 그때 아브라함 뒤쪽에서 갑자기 나타난 천사가 칼을 쥔 아브라함의 팔을 강하게 붙잡는다. 천사의 다른 손이 가리킨 곳에는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있다. 양의 평화로운 머리는 이사악의 고통스러운 얼굴과 대비를 이룬다.


카라바조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떠돌다가 로마의 거리에서 거친 삶을 살았지만, 운 좋게도 그를 지원해 주는 후원자를 만나 비교적 빠르게 성공했다. 대담한 구성과 강렬한 명암 대비, 거리의 사람들을 등장시킨 그의 쎈 성화는 세계의 수도 로마에 온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고 감식자들을 매혹했다. 카라바조에게 이상적인 형상과 고귀한 분위기로 묘사된 르네상스의 성화는 거짓처럼 보였다. 그는 가장 그럴듯한 인물을 길거리에서 캐스팅해 실내의 강한 조명 아래 포즈를 취하게 했다. 그 앞에서 직접 빠르게 그렸기 때문에, 그림은 바로 앞에서 연극을 보듯 생생하다. 대담한 자연주의와 극적인 조명 효과는 보는 이의 눈과 마음에 더욱 호소력이 있었고, 반종교개혁의 중심지인 로마에서 주류의 미술로 자리 잡아갔다.  


카라바조는 아브라함과 이사악의 긴장이 최고조에 다다른 순간을 정말 리얼하게 담아냈다. 아브라함의 벗겨진 머리, 이마와 손등의 주름, 격양된 감정으로 붉어진 얼굴까지 화가는 믿음의 조상을 미화하지 않았다. 또한 다른 화가들이 잘 드러내지 않았던 이사악의 두려움과 공포를 표현해 관람자에게 대면케 했다. 배경도 척박한 중동이 아닌 로마 외곽의 풍경으로 그렸다. 강렬한 조명은 왼쪽 상단에서 오른쪽 하단으로 비치는데, 고뇌로 가득한 아브라함의 머리, 힘이 교차하는 아브라함의 손과 천사의 손, 이사악의 절규하는 얼굴로 이어진다. 카라바조는 희생 제물이 된 아들의 절규에도 불구하고 주의 명을 따르는 아브라함의 굳건한 의지와 믿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괴팍하고 폭력적인 성향의 화가는 수차례의 범죄와 결국 살인까지 저질러 젊은 나이에 도피하며 살았다. 그 와중에 그렸던 성화들은 상당수 참수나 죽음을 주제로 하고 있고 그의 어두운 경험과 그늘이 반영되어 있다. 거기에는 이 그림처럼 카라바조만이 표현할 수 있는 날것의 폭력과 살기가 담겨 있다.   


렘브란트, <이삭의 희생>, 1635년 캔버스에 유채, 193 x 133 cm 에르미따주 미술관, 상트페테르부르크


네덜란드의 화가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희생 제사의 정점을 포착했다. 전면에 이사악은 두 손이 뒤로 묶인 채 장작 위에 누워 있다. 아브라함이 아들의 얼굴을 한 손으로 감싸고 칼을 내리치려는 순간, 주의 천사가 날아와 그의 팔을 붙잡는다. 망연자실한 얼굴의 아브라함은 천사의 등장에 놀라 그만 쥐고 있던 칼을 놓쳤다. 날카로워 보이진 않지만 떨어지는 칼이 이사악의 몸을 향해 있어 아슬아슬해 보인다. 해 질 녘 산 중턱을 배경으로 이사악의 몸이 빛을 발한다.  


카라바조와 렘브란트의 작품은 같은 구성으로 보이지만, 시선과 초점과 세부에서 차이가 있다. 수직의 캔버스에서 천사는 구름을 몰고 날개를 펄럭이며 하늘에서 날아든다. 천사는 아브라함의 손을 살포시 잡았고,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듯 다른 손은 하늘을 향해 들었다. 아브라함은 어떤가. 백발의 머리카락과 수염을 가진 인자한 노인은 사랑하는 아들이 공포를 느끼지 않도록 손으로 얼굴을 완전히 가려주었다. 한편으론 자신이 아들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천사와 아브라함, 이사악의 육체는 손으로 부드럽게 연결되어 있고, 서로에 대한 배려와 공감이 스며있다. 카라바조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폭력성과 긴장은 찾아보기 어렵다. 장식용 칼에 가까워 보이는 아브라함의 칼은 렘브란트가 사모았던 이국의 수집품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무엇보다 칼이 떨어지는 그 찰나를 포착한 것이 이 그림에 엄청난 매력과 드라마를 더해준다.


이 작품에서 가장 특징적인 점은 이사악의 몸이 전면에 제시되고 모든 빛이 거기에 집중되었다는 것이다. 앞의 그림들과 다르게 이사악은 청년이고, 자기가 벗어 장작 위에 깔았을 옷 위에 누워있다. 여기선 항상 등장하는 숫양이 보이지 않는다. 샅바(loincloth)만 두른 그의 몸은 또한 누군가를 연상시킨다. 모든 단서들이 하느님의 명에 힘겨워하는 아브라함을 위해 이사악이 자발적으로 제물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게다가 십자가 모양으로 놓인 장작 위에 누운 이사악의 모습은 한참 후 예루살렘에서 옷이 벗겨져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떠올리게 한다. 렘브란트의 이사악은 신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 보내신 어린양, 즉 예수를 예표한다.

 


안드레아 브루스톨론,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 1700-10년, 나무에 코팅, 높이 43.8cm


이탈리아의 조각가 안드레아 브루스톨론(Andrea Brustolon, 1662~1732)은 다른 화가들과 다르게 살인 전 공포와 전율에 사로잡힌 아브라함의 절규를 담았다. 백 살에 얻은 아들 이사악은 두 손이 결박당한 채 제단 위에 있다. 그 옆엔 번제를 위한 불도 놓여있다. 아브라함은 이사악의 어깨에 한 손을 얹고, 칼을 번쩍 들어 올렸다 내리꽂으려 한다. 주님의 명이지만 어찌 아비가 자식을 죽여 번제를 드릴 수 있을까. 절규하는 아브라함의 얼굴과 휘날리는 수염, 펄럭이는 옷자락은 보는 이를 애타게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놀란 그의 눈은 휘둥그레하고 입도 벌어져 있다. 조각되지 않았지만, 하늘에서 주님의 천사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고 불렀기 때문일 것이다.

 

안드레아 브루스톨른은 조각가이자 가구 디자이너로, 상류층의 실내를 장식하는 현란한 바로크 가구와 연극적인 작은 조각상을 주로 제작했다. 50cm 정도의 이 조각이 집에 놓여 있으면 아브라함의 절규에 마음이 그리 편하지는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조각상은 일상에서 홀로 성경을 묵상하거나 손님과의 대화에서 이야깃거리를 던져주었을 것이다.



마르크 샤갈, <이사악의 희생>, 1960-66년, 캔버스에 유채, 230 x 235cm,  마르크샤갈국립성서박물관, 니스


마르크 샤갈<이사악의 희생>은 그만의 부유하는 형상과 환상적인 색의 언어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여기서도 하단에 장작 위에 알몸의 이사악이 길게 누워 있다. 아브라함은 한 손을 아들의 무릎에 얹고 막 칼을 들어 내리꽂으려 한다. 천사의 부름에 고개를 든 아브라함의 얼굴은 슬픔과 고통으로 거의 넋이 나가있다. 왼쪽 하늘에선 하얀 천사가 다른 천사를 아브라함에게 보내 이 모든 것을 멈추게 한다. 그 아래 나무에는 이사악을 대신할 어린 숫양이 보인다. 뒤쪽엔 성경에 언급되지 않았지만 하느님의 명령에 가장 마음 졸였을 어머니 사라가 등장한다. 그림 상단 오른쪽에는 성모자의 모습과 모자를 쓴 유대인, 십자가를 지고 가는 예수 등이 보인다.    


마르크 샤갈, <일곱 손가락을 가진 자화상>, 1913년, 캔버스에 유채, 127 x 107cm, 암스테르담 시립미술관

샤갈은 색으로 이야기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었다. 붉은색으로 물든 아브라함과 주변은 그가 겪은 내적 혼돈과 격양된 감정을 드러낸다. 하양과 파랑으로 채색된 하늘과 천사의 영역은 영적이면서도 신을 경배하는 숭배의 공간이다. 노란색으로 물든 청년 이사악의 몸은 영적으로 승화된 상태를 보여준다. 그의 하체에는 붉은색도 섞여있는데, 아버지의 고통을 그도 느낀다고 말하는 것 같다. 재미있는 세부도 눈에 띈다. 아브라함이 칼을 든 손을 자세히 보면 손가락이 좀 많다. 샤갈이 청년 시절 파리로 막 유학 왔을 때 그린 자화상(1913)에도 그는 자신을 7개의 손가락을 가진 턱시도 차림의 화가로 묘사했다. 이것은 손이 빠르고 그림 실력이 뛰어남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일곱 손가락을 가진 아브라함은 무엇을 의미할까? 구약에서 7은 완전수이기에, 그의 온전한 믿음을 드러내는 것일까. 하단에 침착하게 누워 있는 이사악은 흥미롭게도 한쪽 눈을 뜨고 있다. 두 눈을 감고 기다리다가 천사의 부름에 놀라, ‘아, 살았다’하고 안심하는 것 같아 웃음이 나온다.


샤갈의 작품은 렘브란트의 그림과 비슷한 맥락에서 그려진 것을 알 수 있다. 이사악은 고민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읽고 번제의 제물이 되기를 선택한 것이다. 스스로 희생양이 된 이사악은 상단의 십자가를 진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하기도 한다. 아들을 죽음에 몰았던 아브라함은 이 땅에 희생양으로 예수를 보낸 하느님과 겹쳐 보인다.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 샤갈은 유대 경전 『토라』에 익숙한 데다 그리스도교의 해석도 혼합해 표현했기 때문에 보기보다 그림 읽기가 쉽지는 않다. 상단에 십자가를 진 예수 옆에는 모자를 쓴 유대인이 경전 『토라』를 들었고, 두 손을 들고 기도하는 여인은 홀로코스트의 어두운 그림자를 연상시킨다. 샤갈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십자가에 희생된 예수를 홀로코스트로 무참히 짓밟힌 자기 민족과도 연결시켰다.  



“나는 나 자신을 걸고 맹세한다. 주님의 말씀이다. 네가 이 일을 하였으니, 곧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나는 너에게 한껏 복을 내리고, 네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한껏 번성하게 해 주겠다. 너의 후손은 원수들의 성문을 차지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순종하였으니,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너의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창 22, 16-18)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 <우물가의 레베카> , 1660년경, 캔버스에 유채, 108 x 151.5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하느님의 대한 믿음으로 아들을 바치려 했던 아브라함, 기꺼이 희생양이 되려 했던 이사악은 그래서 믿음과 순종의 조상으로 추앙받고 있다. 시험을 거친 부자는 더욱 굳건한 믿음으로 한 단계 나아갔다. 사라는 127살까지 살았고, 아브라함은 그녀를 위해 헤브론에 땅을 사 안장했다. 나이가 들어가자 아브라함은 이사악의 아내를 얻고자 늙은 종을 친척이 있는 하란에 보낸다. 며느리는 여호와를 섬기는 집안이고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살아야 하는 조건이었다. 종이 우물가에 도착해 자기와 낙타에게 물을 대접하는 여인이 하느님이 정하신 신붓감이기를 기도했다. 그때 아름다운 레베카(리브가)가 항아리에 길어온 물을 이방인 손님과 낙타에게 준다. 하느님을 섬기는 이들에게 나그네를 정성껏 대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덕목인지를 말해주는 대목이다. 종은 레베카에게 보석을 선물을 주며 누구의 딸인지 물었고, 아브라함의 조카의 딸이었던 레베카는 아버지의 집에 종을 초대했다. 그가 모든 사정을 설명하고 결국 가족과 레베카가 받아들여 그녀를 아브라함의 땅에 데려간다. 이사악은 레베카를 환영하며 어머니의 천막으로 맞아들인다.


아브라함은 175세까지 ‘한껏 살다가 숨을 거두었다’(창 25,8). 기원전 20세기경 고대근동이라는 아브라함의 시공간을 떠올려보면, 아직 구약도 쓰이지 않고 유대교와 그리스도교도 정립되지 않는 시대였다. 아브라함은 발달된 도시와 문명 밖의 나그네였고, 그의 하느님은 화려한 신상도 거대한 신전도 없는 변방의 신이었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파란만장한 삶 속에서도 하느님의 부르심을 따랐고 하느님의 약속을 끝까지 붙잡고 살았다. 하느님과 함께 걸으면서 아브라함은 하는 모든 일마다 복을 받았다. 생애 동안 하느님이 약속하신 땅은 받지 못했지만, 그 약속은 이어 이사악, 야곱, 요셉까지 그의 후손들을 통해 계속해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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