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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연희 Aug 08. 2023

5-1. 야곱_뒤에서 속이는 자

: 야곱의 축복


(니콜라 사리치가 '증인' 시리즈에 야곱을 그리지 않아 이번 장은 아쉽게도 그의 그림으로 시작하지 못했다.)


창세기에 등장하는 성조(聖祖)들 가운데 나를 가장 사로잡았던 인물은 야곱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가 하느님을 만나고 각성하며 변모하는 사건들이 오랫동안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어쩌면 그 이야기와 그림들을 되씹어 보면서 너무 흥미로운 나머지 글을 써야겠다는 결심을 했던 거 같다.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이사악, 야곱, 요셉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조상들 가운데, 야곱은 거룩함과는 먼 이기적이고 약삭빠른 비호감 인물이다. 그런데 파란만장한 인생역정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 점차 믿음이 자라났고,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받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시조가 되었다.


야곱(Jacob)은 이름이 의미하듯 쌍둥이 형 에사우(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와 남을 ‘속이는’ 삶을 살았다. 몹시 배고픈 형에게 죽 한 그릇을 미끼로 얼렁뚱땅 장자권을 샀고, 눈이 어두운 아버지 이사악을 속여 형에게 돌아갈 축복을 가로챘다. 하지만 형의 위협을 피해 도망가는 와중에 꿈속에서 하느님을 만나 축복을 받았다. 야곱은 어디에서든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음을 깨닫고 그곳을 거룩하게 하여 성전의 기초를 놓기도 했다. 한 수 위인 삼촌 라반의 계략에 오랜 세월을 붙잡혀 일했지만, 사랑하는 여인과 대가족을 이루며 엄청난 부를 쌓았다. 두려움으로 돌아가는 귀향길에 야곱은 밤새 알 수 없는 자와 싸우며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자로 탈바꿈되는 경험을 한다. 평생 축복을 쫓아 남을 속여온 야곱은 집요한 끈기로 성장해 믿음의 성조가 되었다.      



아브라함이 아들 이사악을 위해 종을 멀리 보내 데려온 며느리 레베카(리브가)를 기억할 것이다. 사라처럼 불임이었던 레베카는 남편 이사악의 간절한 기도로 임신했고, 쌍둥이는 뱃속에서부터 부딪치며 싸웠다. 이름이 의미하듯 살갗이 붉고 털이 많은 첫째는 에사우(에서)로,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온 둘째는 야곱으로 불렸다. 둘은 외모만큼이나 기질과 성격도 달랐다. 능숙한 사냥꾼인 에사우는 고기를 좋아한 아버지의 애정을 받았고, 온순하고 천막에 머물며 어머니를 도왔던 야곱은 레베카의 사랑을 받았다(창 25, 27-8).


헨드릭 테르브루그헨, <장자권을 파는 에사우>, 1627년경, 캔버스에 유채, 106.7 x 138.8cm, 티센보르미네사 미술관, 마드리드


하루는 야곱이 죽을 끓이고 있을 때 허기진 채 돌아온 에사우가 죽을 달라 했다. 그러자 야곱은 형에게 맏아들의 권리를 요구했고, 이를 대수롭게 여기지 않은 에사우는 맹세를 하고 맏아들의 권리를 동생에게 넘겼다. 네덜란드의 화가 헨드릭 테르브루그헨(Hendrick ter Brugghen, 1588~1629)은 촛불이 켜진 어두운 실내에서 진행되는 형제의 거래를 묘사했다. 로마에서의 유학동안 카라바조의 화풍을 익혔던 화가는 빛과 어둠의 대비를 활용해 사건을 더 비밀스럽고 극적으로 표현했다. 이 그림은 사냥에서 돌아온 에사우와 죽그릇을 잡고 있는 야곱뿐만 아니라 음식을 건네는 레베카와 뒤쪽에 이사악도 함께 등장시킨 것이 독특하다. 부모도 자식의 거래를 알게 되는 것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 사건은 고대 근동에서 그만큼 장자의 권리가 컸다는 것을 말해준다. 장자는 형제들보다 두 몫의 재산을 상속받았고, 향후 가부장이 되어 제사와 전쟁 등 모든 대소사의 통솔권을 가졌다. 몇 초 차이로 뒤에 태어난 야곱이 억울할 만도 했겠지만, 그는 약싹 빠르게 기회를 잡아 장자의 권리를 가로챘다. 에사우는 불콩죽과 연관하여 ‘붉은’과 같은 자음으로 구성된 ‘에돔’으로도 불렸다. 쌍둥이 야곱과 에사우는 각각 히브리 민족과 그들에 적대적인 에돔 민족의 기원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후세페 데 리베라, <이사악과 야곱>, 1637년, 캔버스에 유채, 110 x 291.5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이사악은 죽기 전에 에사우를 축복해 주려고 사냥해 별미를 요리해 오라고 지시한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레베카의 계략과 야곱의 속임수로 아버지의 축복은 결국 동생 야곱에게 돌아간다. 스페인의 화가 후세페 데 리베라(José de Ribera, 1591~1652)는 이사악이 축복을 받으러 온 아들이 에사우임을 확인하는 순간을 담았다. 늙어서 눈이 어두워진 이사악은 두 손으로 아들의 팔을 아주 신중하게 만져본다. 너무 빨리 사냥한 고기 요리를 가져온 데다가 에사우가 아닌 야곱의 목소리 같아서 의심스러웠기 때문이다. 어머니의 지시대로 에사우의 옷을 입고 털이 많은 형처럼 염소털을 팔에 두른 야곱은 조심스럽게 팔을 내밀고 있다.


“내 아들아, 가까이 오너라.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사우인지 아닌지 내가 만져 보아야겠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사우의 손이로구나.” (창 27, 21-22)


이 모든 일을 꾸민 레베카는 야곱의 등을 떠밀며 화면 밖을 응시한다. 그녀는 들키더라도 야곱이 받을 저주는 자기가 받겠다고 말하며 이 계략을 주도했다. 경계의 눈빛을 보내는 그녀는 관람자를 조용한 공범자로 만든다. 도대체 왜 레베카는 맏이가 아닌 둘째 야곱이 축복을 받도록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것일까? 그 이유는 앞서 임신한 그녀가 배속에서 싸우는 쌍둥이에 대해 물었을 때 하느님의 대답에서 암시되었다. “너의 배 속에는 두 민족이 들어 있다. 두 겨레가 네 몸에서 나와 갈라지리라. 한 겨레가 다른 겨레보다 강하고 형이 동생을 섬기리라.”(창 25, 23) 레베카는 온순하고 집안일을 잘 도와준 야곱을 편애하기도 했지만,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그것을 실현시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오른쪽 탁자 위에는 야곱이 잡아와 레베카가 요리한 음식이 놓여 있다. 빵과 포도주는 축복의 자리에 임재한 그리스도(하느님)를 암시하고, 고기와 레몬은 보는 이의 입맛까지 자극한다. 이제 이사악은 요리를 맛보고, 아들에게 입 맞추게 하여 향취로 확인한 후에 축복을 내릴 것이다. 시각을 잃은 이사악의 주변을 감싼 붉은 천이 유난히 반짝인다. 시각과 청각으로 혼란을 느꼈던 그가 촉각과 후각에 의지한 이 상황은 인간의 불완전한 감각에 관해서도 이야기한다. 그런데 왼쪽 창 너머로 사냥감을 어깨에 메고 돌아오는 에사우의 모습이 보인다. 서둘러야 한다. 좌우로 길게 압축된 이 작품은 아버지의 축복을 놓고 벌어지는 사건의 긴장을 밀도 있게 전달한다.



고베르트 플링크, <야곱을 축복하는 이사악>, 1639년, 캔버스에 유채, 117 x 141cm, 암스테르담 국립미술관


형의 축복을 가로챈 야곱의 이야기는 특히 장르화와 정물화가 발전했던 17세기 네덜란드에서 많이 다루어졌다. 그 가운데 고베르트 플링크(Govert Flinck, 1615〜1660)의 작품은 사건의 드라마와 축복하는 아버지의 따듯함이 가장 잘 표현되었다. 이사악의 새하얀 수염과 제대로 뜨지 못하는 눈은 그의 마지막이 가까워졌음을 나타낸다. 그가 걸친 붉은 모피 외투는 아브라함에 이어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이룬 부를 드러낸다. 이사악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야곱의 손을 잡고 다른 손을 들어 축복한다. 그의 축복을 읽다 보면 그 내용이 썩 마음에 와닿지는 않지만, 부모의 말과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보아라, 내 아들의 냄새는 주님께서 복을 내리신 들의 냄새 같구나.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하늘의 이슬을 내려 주시리라.

땅을 기름지게 하시며 곡식과 술을 풍성하게 해 주시리라.

뭇 민족이 너를 섬기고 뭇 겨레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는 네 형제들의 지배자가 되고 네 어머니의 자식들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 (창 27, 27-29)


형의 가장 좋은 옷을 입고 털가죽 장갑을 낀 채 아버지에게 축복을 받는 야곱은 들킬지도 모르는 두려움에 잔뜩 움츠려 있다. 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자기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아버지까지 속이는 철없는 청년의 얼굴이다. 뒤쪽 탁자에는 음식이 놓여 있고, 레베카는 둘 사이에서 모든 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는지 조심스럽게 지켜본다. 빛의 화가 렘브란트의 작업장에서 잠시 일했던 플링크는 이 그림에서 어둠 속의 빛을 활용했다. 그 빛은 당대 네덜란드 시민들이 사랑했던 화려한 색감과 질감의 옷뿐만 아니라 세 인물의 심리적인 교류와 긴장을 생생하게 비춘다.


창세기에서 특히 흥미로운 것은 이스라엘의 기원이 된 조상들의 이야기가 가정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여성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고대 근동 대제국의 기원 신화가 영웅의 서사로 전개되며 여성의 이름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것과 대조적이다. 역설적이게도 대제국의 신화들은 모두 잊혔지만(뒤늦게 발굴을 통해 알려졌지만), 작은 가정에 찾아오신 하느님의 이야기는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를 통해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다. 또 하나 당시 철저한 가부장 사회였지만, 구약에서는 둘째나 막내가 아버지를 계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느님의 시선은 형보다 아우, 즉 권력이나 힘이 있는 자보다 가난하고 힘없는 자들에게 머무르는 경우가 더 많았다. 이런 전복과 역설의 시선은 신약에서 예수의 가르침과도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다(주원준, pp.112-123).   





야곱이 물러나고 이후 사냥에서 돌아온 에사우가 요리를 만들어 아버지에게 가져가자, 이사악은 깜짝 놀라 몸을 떨며 좀 전에 야곱에게 축복했음을 깨닫는다. 에사우는 목놓아 울며 자기도 축복해 달라고 애원하지만, 아버지가 그에게 해 준 말은 야속하기 짝이 없다. “네가 살 곳은 기름진 땅에서 저 위 하늘의 이슬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리다. 너는 칼을 의지하고 살면서 네 아우를 섬기리라...”(창 27, 39-40) 그들에게 발화된 축복은 단순한 기원이 아니라 실체였기 때문이다. 인류학적으로 보면 이것은 에사우의 후손 에돔 민족에 대한 야곱의 후손 이스라엘의 우월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장자의 권리와 복을 빼앗긴 에사우는 동생에게 앙심을 품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동생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이에 레베카는 야곱을 오빠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피신시킨다. 이사악은 야곱이 떠나기 전에 하느님이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축복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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