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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연희 Aug 11. 2023

5-2. 야곱_어디라도 사다리를 세운다면

: 야곱의 꿈, 야곱의 사다리


야곱은 에사우를 피해 어머니의 오빠 라반이 있는 하란으로 향한다. 도망 중에 그는 어떤 곳에서 밤을 지내며 누워 자다가 꿈을 꾼다. 그런데 하느님의 천사들이 땅에서 하늘까지 닿는 층계를 오르내렸고, 맨꼭대기에서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이사악에게 그랬듯이 땅과 후손, 축복을 야곱에게 약속하신다. 야곱이 꿈속에서 하느님을 만난 이야기는 많은 화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해 다양한 이미지로 번역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놀랍고 재미있는 작품은 성당 파사드를 장식한 조각이다.



배스 수도원 성당 파사드, 영국 서머싯주


영국 남서부 서머싯주에 있는 배스 수도원 성당(Bath Abbey)은 16세기에 120년에 걸쳐 지어진 고딕 성당으로, 내부에 아름다운 부채꼴 모양의 볼트(아치형 천장)가 특히 유명하다. 1520년경에 건축된 서쪽 파사드(건물 정면) 앞에 서면 양쪽에 두 개의 탑을 장식한 사다리와 그 위에 작은 형상들이 눈에 띈다. 가까이 가서 보면 날개 달린 천사들이 사다리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있다! 물론 성당 아래서는 천사들의 옷주름만 겨우 보이지만, 세부 사진으로 보면 다양한 얼굴과 자세의 천사들이 감탄을 불러일으킨다. 맨 꼭대기에는 말씀처럼 야곱을 축복하는 하느님이 보인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도망 중인 야곱에게 내려진 하느님의 축복은 과분할 정도다.


“나는 네가 누워 있는 이 땅을 너와 네 후손에게 주겠다... 땅의 모든 종족들이 너와 네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보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면서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고, 너를 다시 이 땅으로 데려오겠다. 내가 너에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창 28, 13-15)


사다리 혹은 층계는 땅에서 시작해 하늘에 이르는 구조물로 다양한 상징의미를 내포한다. 고대 바빌론의 신전인 지구라트에서 계단은 지상 세계와 신의 세계를 연결하거나 인간과 신 사이의 단절된 관계를 이으려는 갈망이 담겨있다. 일반적으로 사다리는 정신적인 상승이나 영적인 성숙을 상징한다. 또한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요 1, 51)라는 말씀처럼, 우리와 하느님을 연결하는 예수님을 상징하기도 한다. 유대 랍비들은 야곱의 꿈을 이전부터 그를 보호하는 천사들의 임무 교대로 보았는데, 이는 하느님이 항상 야곱과 함께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하늘까지 닿는 사다리(층계)와 이를 오르내리는 천사들은 하느님의 돌보심 혹은 하느님과의 영적 교제로 이해할 수 있다.



위의 세부


잠에서 깨어난 야곱은 하느님이 바로 여기에 함께 계셨음을 깨닫고, 아침 일찍 베고 자던 돌을 세워 기름을 부은 후, 그곳을 베텔, 즉 ‘하느님의 집’이라고 부른다(창 28, 18-19). 상징적으로 야곱은 최초의 성당 건축가였다. 그런 면에서 하느님의 집인 성당에 하느님의 돌보심과 영적 소통을 의미하는 ‘야곱의 사다리’를 조각한 것은 탁월한 선택이 분명하다. 당시 배스 지역의 주교 올리버 킹(Oliver King, 1495-1503 재직)이 야곱이 본 비전과 같은 꿈을 꾸면서, 파사드 장식으로 이 도상을 제안했다고 한다. 물론 여기서 야곱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사다리 앞에 서면 누구나 저 위 하느님과 눈을 맞추고 축복을 받는 야곱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특별하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집이다. 여기가 바로 하늘의 문이로구나.”(창 28, 17)    



아담 엘스하이머, <야곱의 꿈>, 1600년경, 동판에 유채, 19.5 x 26.1cm, 슈테델 미술관, 프랑크푸르트


독일의 화가 아담 엘스하이머(Adam Elsheimer, 1578〜1610)의 <야곱의 꿈>은 노트 크기의 작은 그림이다. 큰 나무 아래 야곱은 정면을 향해 발을 뻗고 누워 곯아떨어졌다. 팔과 다리가 사방으로 뻗어 있는 것으로 보아 무척 고단한 하루를 보낸 것 같다. 주변에는 작은 짐보따리와 동행한 개가 보인다. 딱 집 나온 아들 같은 모양새다. 화가는 척박한 중동이 아닌 고향 독일의 깊은 숲과 강이 흐르는 풍경을 배경으로 삼았다. 초록과 파랑의 우거진 숲과 하늘, 강 풍경은 보는 이를 신비의 세계로 이끈다. 야곱이 누운 갈색의 지상 세계와 대조적이다. 야곱 위로는 하늘로 뻗은 작은 사다리와 요정 같은 천사들이 보인다.


엘스하이머는 이처럼 작은 동판에 압축된 풍경을 세밀하게 묘사한 ‘캐비닛 그림(cabinet painting)’을 여럿 남겼다. 특히 그의 시적인 밤풍경은 유럽의 수집가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캐비닛 그림은 과시용으로 걸어놓은 큰 그림과 다르게 귀중품들과 함께 자기만의 사적인 공간(study, office)에 놓여 개인적인 감상과 묵상을 이끌었다. 이 작품을 주문한 이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도망자의 모험을 상상하며 즐겼을까, 야곱이 꿈에서 하느님에게 받은 축복을 갈망했을까, 어쩌면 두려운 상황에서 야곱처럼 지금 여기에 하느님이 함께하신다는 위로와 깨달음을 얻었을까.



후세페 데 리베라, <야곱의 꿈>, 1639년, 캔버스에 유채, 179 x 233cm, 프라도 미술관,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에 소장된 후세페 데 리베라(José de Ribera, 1591~1652)의 그림은 실물 크기의 야곱이 등장하는 대형작이다. 앞선 숲 속 배경과 다르게 야곱은 쓰러져가는 나무 앞에 돌을 베고 곤히 잠들었다. 그는 칙칙한 차림에 수염이 덥수룩한 도망자의 행색이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 사이로 밝은 빛이 그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다. 그런데 그 빛 속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이 보인다. 눈을 씻고 보면 투명한 빛의 사다리를 아주 작은 천사들이 오르내린다. 화가는 황량한 지상의 갈색 풍경과 하늘의 영적 세계로 화면을 양분하고, 두 세계를 연결하는 빛으로 야곱의 꿈을 암시하는 시적인 표현을 선택했다. 그래서 섬세한 관찰자만이 보일락 말락 한 천사들을 발견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참고로 리베라의 전형적인 작품은 이렇듯 부드럽고 서정적인 그림이 아니다. 스페인 출신의 화가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베네치아의 대가들과 카라바조의 양식을 연구했고, 성경과 신화의 잔인한 죽음과 순교의 장면을 자주 그렸다. 스페인령인 나폴리에 정착해(1616) 평생을 살면서 무척이나 어둡고 극적인 장면을 그리다가, 점차 위의 <야곱의 꿈>처럼 밝고 온화한 작품을 남겼다. 아래 두 작품을 보면 화가의 상상력에 따라 야곱이 꿈속에서 본 비전이 얼마나 다채롭게 표현될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또한 단순한 구성과 섬세한 색감만으로 이야기를 담백하게 전달한 리베라의 그림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도 깨닫게 된다.



도메니코 페티, <야곱의 꿈>, 1619년경, 60.5 x 44.5cm, 빈미술사 박물관/  아렌트 더 헬더르, <야곱의 꿈>, 1715년경, 66.7 x 56.9cm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 <야곱의 꿈>, 1726-29년, 프레스코, 파트리아르칼레 궁전, 베네치아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Giovanni Battista Tiepolo, 1696∼1770)의 <야곱의 꿈>은 베네치아에 있는 총대주교 궁전의 천장을 장식한 프레스코화다. 거의 땅에서 본 시점으로 잠든 야곱과 하늘로 치솟은 계단이 묘사되어, 마치 천장이 뚫린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화면 둘레의 장식뿐 아니라 야곱이나 천사의 차림도 18세기 로코코 시대 귀족의 감성을 반영해 밝고 경쾌하다. 성서에서 은 신의 특별한 계시이자 임무를 전달하는 수단으로 중요하게 여겨졌다. 불안한 도망 중에 꾼 꿈을 통해 야곱은 어딘지도 모르는 척박한 그곳이 하느님이 거하는 집이며, 계단(사다리)이 놓인 바로 이 땅에서 시작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하느님의 자비는 야곱을 서서히 변화시킨다.


야곱의 업적은 무엇이기에,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이 그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아브라함은 믿음과 신앙의 결단으로, 이사악은 자기희생의 신앙으로, 야곱은 그 깨달음으로 이스라엘 신앙의 아버지가 되었다(배철현 2011, p.101). 즉 바로 여기, 자신이 선 바로 그곳이 하느님이 계신 곳이라는 것을 처음 인식한 것이다. 그 깨달음이 있다면 어느 장소, 어느 상황에 놓여 있든지 사다리를 세우기만 하면 된다.  



윌리엄 블레이크, <야곱의 사다리 꿈>, 1799-1806년, 종이에 펜과 수채, 39.8 x 30.6cm, 대영 박물관, 런던


마지막으로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의 수채화로 가보자. 독창적인 상상력을 가진 블레이크는 누구도 시도하지 않은 나선형 계단으로, 유동하는 듯한 꿈속의 비전을 표현했다. 하단에 대자로 누운 야곱은 평화롭게 곤히 잠들어 있다. 주변은 마치 무한한 우주처럼 암흑 속에 별이 반짝이고, 위로 올라갈수록 광휘를 발하는 빛으로 밝아진다. 맨 위에 빛의 근원인 동그란 문은 하느님이 거하는 하늘의 문을 나타낼 것이다. 계단을 오르내리는 천사들은 가늘고 긴 몸에 날개가 있기도 없기도 하고 아기 천사와 동행하기도 한다. 천사들은 다양한 물건들을 들고 있는데, 먹을 것과 마실 것, 책, 악기, 도구 등이 눈에 띈다. 위쪽 이들의 모습은 돌봄과 만남, 포옹과 사랑 등 우리가 긴 인생에서 원하고 바라는 행복을 암시하는 것 같다. 이것들은 야곱이 꿈에서 깨어나 서원하며 하느님이 채워주시기를 바랐던 것들이다. 야곱의 조건적인 믿음은 아직 성숙해 보이지 않지만, 앞으로의 고생길에서 그가 복을 받을 만한 인물로 성장할지 지켜볼 일이다.    


“하느님께서 저와 함께 계시면서 제가 가는 이 길에서 저를 지켜 주시고, 저에게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마련해 주시며, 제가 무사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주님께서는 저의 하느님이 되시고, 제가 기념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은 하느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께서 주시는 모든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당신께 바치겠습니다.” (창 28, 20-22)



마르크 샤갈의 사랑스러운 성경 삽화도 올려본다.


마르크 샤갈, <야곱의 사다리>, 1958년, 에칭과 채색, 29.5 x 24.4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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