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연희 Jun 13. 2023

2-3. 카인과 아벨_카인의 살인, 그 이후


하느님은 카인이 한 일을 아시고 낙원에서 아담과 하와를 쫓아내셨듯이 그 땅에서 카인을 쫓아내셨다. 카인은 농작을 해도 수확물을 얻을 수 없고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형벌을 받는다. 카인이 떠돌며 헤매다가 낯선 이들에게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자, 하느님은 카인에게 표를 찍어 주어 누구도 그를 죽이지 못하게 하셨다. 신은 형제를 죽인 살인자에게도 결국 자비를 베푸셨다. 카인은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았고, 이 죄인의 후손들을 통해 인류 최초의 문명이 시작되었다.



윌리엄 블레이크, <아담과 하와가 발견한 아벨의 시체>, 1826년, 목판에 잉크와 템페라, 32.5 x 43.3cm, 테이트, 런던


상상력이 풍부한 소수의 화가들은 카인의 살인 이후, 성경에 언급되지 않은 아담과 하와의 슬픔을 표현하기도 했다. 영국의 유명한 시인이자 화가 윌리엄 블레이크(William Blake, 1757∼1827)는 아담과 하와가 죽은 아벨과 도망치는 카인을 발견하는 순간을 담았다. 현장에서 부모에게 발칵된 카인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며 괴로움과 후회로 몸서리친다. 뒤쪽에 아담은 큰아들이 저지른 일을 깨닫고 충격에 넋이 나갔다. 하와는 작은아들의 죽음에 망연자실한 듯 시체 위로 몸을 둥글게 말아 통곡한다. 전면에 놓인 삽과 길게 파인 땅은 카인이 동생의 시체를 숨기기 위해 작업하던 중임을 알려준다. 카인 주변에는 그의 분노를 나타내는 열기가 솟구쳐 오르고 그 위로 먹구름이 깔려있다. 


붉게 타오르는 태양과 어둠이 드리워진 간결한 원색의 배경으로 인해 알몸의 인물들이 더욱 눈에 띈다. 비극의 순간이지만 이들의 몸짓은 발레리나처럼 우아하다. 한 다리를 뒤로 쭉 뻗은 카인의 다리, 새의 날갯짓처럼 편 아담의 두 팔, 두 손을 위로 잡아 몸을 둥글게 말은 하와까지, 우아한 몸의 언어로 감정을 전달한다. 게다가 자괴감에 빠진 카인과 절망하는 아담의 얼굴 표정은 무대 위의 배우처럼 극적이다. 하느님의 명령을 어겨 낙원에서 추방될 때 절망했던 아담의 얼굴이 아들 카인에게서도 반복되고 있다. 블레이크는 단테의 『신곡』,  존 밀턴의 『실낙원』, 그리고 뒤에서 살펴볼 구약의 「욥기」 등의 삽화를 그리면서도 텍스트에 대한 자기만의 시각과 환상을 표현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적 환상을 보았고, 기상천외한 상상력으로 창조한 독특한 형상과 장면으로 인해 미치광이라 불리기도 했다. 스티브 잡스가 따분할 때마다 지루할 틈이 없는 그의 시와 그림들을 자주 들춰본 것으로도 유명하다. 형제 살인 이후, 가족의 비극과 절망의 드라마는 블레이크를 통해 더욱 선명해졌다.



윌리엄 부그로, <첫 애도>, 1888년, 캔버스에 유채, 203 x 252cm, 아르헨티나 국립미술관, 부에노스 아이레스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아카데미 화가, 윌리앙 아돌프 부그로(William Adolphe Bouguereau, 1825〜1902)<첫 애도>도 살인 이후의 풍경을 묘사했다. 블레이크의 그림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데 먼저 크기에서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보자. 아담과 하와는 거친 들판에서 죽은 아벨을 발견하고 슬퍼한다. 카인은 벌써 현장을 떠났고, 아벨의 핏기 없는 시신은 아담의 무릎 위에 활처럼 휘어져 놓여 있다. ‘아벨(Abel)’이라는 이름이 뜻하듯이 그는 ‘증기’처럼 ‘허무’하게 가버렸다. 아벨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순교자이자 예수의 죽음과 희생을 예표하기도 한다. 아벨의 머리 아래에 고인 새빨간 피는 카인이 가한 폭력을 말해준다. 하와는 차마 보기 어려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아담의 가슴에 안겨 울고 있다. 그런 하와를 안고 위로하는 아담도 아픈 가슴에 손을 얹었다. 이름의 의미하듯 ‘아담’의 몸은 유난히 ‘붉은 흙’ 색인데, 에덴에서 쫓겨난 인간의 운명을 떠올리게 한다.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양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 너는 먼지이니 먼지로 돌아가리라”(창 3, 19) 


멀리 오른편의 제단에서는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른다. 하늘을 가득 메운 회색빛 연기가 장면에 우울함을 더하는데, 마치 카인의 죄악, 인간의 폭력성이 세상에 퍼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최초의 인간 아담과 하와의 원죄는 자식 대에 피를 보는 살인으로 더욱 증폭되었다. 아버지가 죽은 아들을 무릎에 올려놓은 이 장면은 어쩐지 죽은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 즉 피에타를 떠올리게 한다. 공교롭게도 부그로는 이 그림을 그리기 바로 직전에 둘째 아들의 죽음으로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아들을 잃은 부모의 상실감이 더욱 진지하고 애잔하게 전해진다.     




엠마누엘 크레센스 리쉬카, <카인>, 1885년, 캔버스에 유채, 110 x 202.5cm, 프라하 국립미술관


보헤미아(현 체코)의 화가 리쉬카(Emanuel Krescenc Liška, 1852∼1903)의 그림은 보기 드물게 카인에게만 주목해 그의 복잡한 심리까지 담아낸 작품이다. 좌우로 길게 펼쳐진 해변의 거친 땅 위에 알몸의 카인이 엎드려 있다. 그는 무언가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는데, 바로 전 동생을 내리쳤던 뾰족한 나뭇가지가 달린 막대기다. 그의 몸을 가린 범의 가죽은 거친 그의 공격성과 어울린다. 화면에 죽은 아벨이 보이지 않지만 어딘가에 그의 시체가 놓여있을 것이다. 오른편에선 시체를 노리는 까마귀가 막 날아든다. 하늘을 뒤덮은 먹구름과 저 멀리 다가오는 까마귀 떼도 스산한 기운을 더한다. 


카인은 지금 무슨 생각에 빠져있을까. 여전히 질투와 분노에서 헤어나지 못했을까, 자신의 행동에 대해 후회하며 죄책감을 느낄까. 이 작품은 선택받지 못한 카인이 느꼈을 질투와 상실감, 후회 등에 주목한 데다, 세밀한 묘사와 배경의 미묘한 분위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져 인상적으로 남아있다. 카인을 마냥 정죄할 수 없게 만든다. 우리 마음속에서도 불쑥 카인이 등장할 때가 있다. 혈연관계를 넘어 자신과 경제적, 정치적, 종교적 이념이 다르다는 이유로 이웃에 대한 미움과 폭력과 전쟁이 반복되지 않는가. 성경에서는 선과 의로움의 통로인 아벨이 주인공이지만, 문학과 미술 작가들에게 카인은 아벨보다 다양한 영감을 주는 캐릭터였다. 영국의 시인 바이런은 카인의 입장에서 이야기를 극화한 『카인』(1821)을, 동료 시인 새뮤얼 테일러 콜리지는 『카인의 방랑』을 썼다. 현대의 많은 영화와 드라마도 카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다. 사실 하느님은 사건이 일어나기 전에 카인에게 해결방법을 미리 알려주셨다. 그리고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의 마음을 잘 살핀다면 우리는 언제든지 그것을 되돌릴 수 있다!  


“너는 어찌하여 화를 내고, 어찌하여 얼굴을 떨어뜨리느냐? 네가 옳게 행동하면 얼굴을 들 수 있지 않느냐? 그러나 네가 옳게 행동하지 않으면, 죄악이 문 앞에 도사리고 앉아 너를 노리게 될 터인데, 너는 그 죄악을 잘 다스려야 하지 않겠느냐?”(창 4, 6-7)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2-2. 카인과 아벨_질투와 폭력, 인간의 어두운 본성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