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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 Jun 10. 2020

할아버지의 다알리아

6월에 접어들자 한여름 무더위가 성큼 다가왔다. 벌써 전국적으로 폭염경보라니. 6월치고 이례적인 날씨에 꽤나 당황스럽다. 재택근무를 하기 위해 서재에 들어왔는데 오후가 되자 점점 길어지고 강해지는 서향 빛에 집중력이 흐려진다. 열어놓은 창밖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얼핏 코끝에 와닿은 진한 여름내음이, 20년 전 외할아버지 댁 평상 위로 나를 이끌었다.


"이 꽃, 다알리아야."


할아버지는 길게 말하는 법이 없으셨다. 중학생 나의 호기심 어린 질문에 꽃이름만 알려주시며, 내 얼굴 크기만한 큼직한 적빛 다알리아를 한참을 어루만지셨다. 무심한 듯한 말투와 달리 마당 평상 옆 외할아버지가 가꾼 작은 정원에는 다알리아를 비롯한 여러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더 어렸던 시절. 사촌언니들 사이에서 손잡고 마당 정원에서 사진찍던 순간에도 뒷편에 다알리아가 보인다. 


돌이켜보면 재건축을 앞둔 작고 허름한 아파트. 이름도 옛스러운 "장미 아파트" 화단이었으니까, 할아버지 개인 소유의 정원도 아니었지만 할아버지는 여름이면 피부가 새카매지도록 정원의 꽃들을 성심성의껏 가꾸셨다. 할아버지는 꽃들을 정말 사랑했다.


외국 생활을 정리하고 들어오시느라 동생과 내가 먼저 귀국해 외할아버지 댁에 잠깐 얹혀살며 중학교를 다니던 그 시절. 금방 귀국하신 부모님과 함께 이사를 해 외할아버지 댁에 살았던 시간은 아주 짧았지만 오늘 불현듯 여름날의 그 평상과 할아버지가 가꾸시던 꽃, 그리고 할머니가 차려주신 밥상이 떠올랐다. 


햇빛이 유난히 쨍하던 여름날, 할아버지가 호스로 물을 뿌리면 거의 내 키만한 다알리아가 싱그럽게 반짝였다. 여린 감성의 소녀였던 나는 그 모습에 매료되어 한참을 넋을 잃고 쳐다보곤 했다.


"할아버지, 이 꽃은요? 저 꽃 이름은 뭐에요?"


할아버지에게 무수히 많은 꽃이름을 물었었는데 다알리아 하나만 뇌리에 남은 걸 보니 할아버지께서 유독 아끼셨던 꽃이었나보다. 꽃잎을 정성스레 쓰다듬던 할아버지의 손길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벌써 20여년 전의 일인데 말이다.





"엄마? 꼬옻ㅡ"


쩅한 햇빛을 등에 지고 놀이터로 향하던 하원길, 해인이가 바닥에 떨어져있던 나뭇잎을 만져보느라 길을 걷다 갑자기 쪼그려앉는다. 더 서툰 걸음걸이로 어린이집으로 향하던 봄날에는 흩날리던 벚꽃잎, 목련 꽃잎을 수시로 줍느라 등원길에 멈춰서곤 했는데... 그새 여름이다. 


고작 하나의 계절을 넘어서서, 이제 여름의 초입에 들어섰을 뿐인데 20개월이 된 아이는 내 손을 놓고 와다다 혼자 앞으로 내달린다. 아이의 성장과 변화에 수반되는 일련의 과정들을 밀도있게 곁에서 지켜보며 함께 겪는 중이라 그런가. 한층 자란 아이와 함께 맞이하는 두번째 여름, 그 계절의 변화는 한층 더 깊은 의미로 다가온다.


코로나 때문에 20개월이 되도록 제대로 된 체험, 경험을 할 기회도 제공을 못해준 것 같아서 늘 미안하고 속상하던 참에 돌아가신지 10년도 한참 더 지난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새삼 위로로 다가온다. 20년이 지나도 머릿속에 남는 건 어쩌면 대단하고 화려한 기억만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의 소소함, 거기서 느껴지는 따뜻한 온기나 사랑 같은 무형의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하루에 하루를 더해 쌓아가는 매일매일의 일상이 훗날 해인이의 삶의 근간을 이루고, 그 중 불현듯 떠오른 어느 하루의 한 순간에 미소지을 수 있다면 나는 아이의 삶에 유의미한 기여를 했다고 자부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 나무에서 떨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새파란 빛이 감도는 작은 나뭇잎을 아이 손에 꼭 쥐어주며 서로 마주웃었다. 


"이 꽃, 다알리아야."

그 날 우리 할아버지가 달랑 꽃 이름 하나만 알려주신 줄 알았는데... 한여름 햇살 아래서 그 꽃 주위를 감싸고 돈 사랑의 온기가, 할아버지가 살아생전 얼굴 한번 보지 못했던 증손녀에게로 흘러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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