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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 Oct 07. 2019

딸의 냉장고

밤 11시가 넘은 시각, 한우 안심 덩어리육을 아이가 씹을 수 있을만큼 작은 크기로 다지면서 나도 모르게 한숨섞인 푸념이 나왔다. 매일 아이를 재운 후 시작되는 나의 본격 일과. 아이가 내일 먹을 식재료와 과일을 모두 손질하고, 그간 차일피일 미뤄뒀던 장난감들을 모두 세척, 살균하고, 미리 장봐둔 식재료들이 상하기 전에 소분하여 냉동보관한 후 설거지를 모두 마치고 씻고 자야한다.


소고기를 다지고 있는 내게 남편이 다가와 말했다.

"장모님이 어제 우리 집오셔서 냉장고 보시다가 그러더라. 너 대단하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새어나왔다. 어제 아이 돌잔치가 있어 겸사겸사 우리집에 오신김에 내가 먹을 반찬과 아이가 먹을 밤을 일일이 까 한입크기로 손질해오신 걸 넣으려 냉장고 문을 열다가 하신 말인 걸 알아서. 냉장고 한 칸에 켜켜이 쌓아놨던 내 아이를 위한 다양한 종류의 밥과 손질해놓은 과일 아래, 김치랑 내가 먹을 반찬 한 두어가지만 덩그러니 놓여있는 아래칸. 냉장고 문을 잡고 그걸 바라보시던 엄마의 마음이 뭔지 조금 알 것 같아서, 눈시울이 붉어졌다.


어렸을 적, 끼니 때마다 정겹게 들리던 엄마의 칼질소리와 보글보글 국이 끓는 소리, 곧이어 온 집안을 가득 메우는 음식 냄새가 그렇게 포근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우리 가족을 위한다는 것. 최선을 다해 온 몸과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표현이 집안 구석구석 배어들었다. 미국과 싱가폴에서 아빠 따라 주재원 생활을 할 때도 늘 한식을 요리해주던 엄마. 그 때문일까. 10년 가까운 외국생활을 했어도 내 입맛은 그렇게 한국적일 수가 없다.

엄마 아빠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도시락 편지

학교 가서 도시락통을 열때도 매번 종류가 달랐던, 정갈한 밥과 반찬 위로 엄마의 사랑이 빼곡히 들어찬 도시락 편지까지 들어있었다. 어린 마음에 도시락을 열기 전, 얼마나 설레고 기다렸는지..

요새 해인이 식사 준비를 하면서 맛있는 냄새가 집안에 솔솔 풍길 때 혼자 놀던 아이가 꺄악-하며 나를 보고 일어서서 활짝 웃어줄 때, 해인이한테도 그 포근함이 전이되었을까 생각해본다. 나를 위해 식사를 준비해주는 엄마. 그 존재만으로도 얼마나 가슴이 따뜻해지는지.


해인이를 낳고서 내가 아이를 대할 때, 나도 모르게 은연중에 엄마를 따라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 놀랄 때가 많다. 내가 보고 자란 어머니상인데 당연하다 싶지만 남편은 아이만 바라보며 평생 헌신만 하는 어머니가 되지는 말라한다. 내 삶의 영역도 소중히 지켜나갈 줄 알아야 해인이도 그런 엄마를 더 자랑스럽게 보고 배울거라고.


부엌에 서서 남편의 말을 들으며 공감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자꾸만 엄마 모습이 떠오른다.

왜 가족 모두가 자러 들어간 시각, 주방 불은 밤늦도록 꺼지지 않았는지. 가족 모두 편히 누워있을 때 왜 엄마는 앞치마를 두른 채로 홀로 서있었을 수밖에 없었을지. 환갑을 넘긴 지금에서도. 엄마의 그림자가 부엌과 가장 가까웠던 내 방 문턱까지 길게 드리워졌을 때, 타닥타닥 칼질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을 청했던 시절에 좀 더 일찍 깨달았어야했다.


자정이 넘었으니 오늘은 10월 7일. 해인이가 태어난지 딱 1년이 되는 날. 아이의 생일이다.

해인이를 위한 첫 생일 기념 특별식을 준비하며 먼 미래, 해인이의 냉장고 문을 열어보는 나를 상상해본다.

해인이에게 나는 어떤 엄마로 기억될 수 있을까. 나는 어떤 엄마가 되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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