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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 Nov 14. 2019

계절에 맞는 풍경

2017년 12월 4일 이사 전날

"내일 아침은 어떤 걸로 준비할까?"


가장 먼저 생각난 건 선물받은 천혜향 마지막 3알. 알알이 살아있는 천혜향을 까고 나니 손끝에 새콤달콤한 향이 배어있다. 통에 한가득 까놓으니 부자가 된 기분이다.


내일 한파라는데 이것만 먹기엔 빈속에 아무래도 속이 찰 것 같아 고구마도 곁들어 준비해놓기로 한다. 올 겨울 들어 먹는 첫 고구마. 고구마를 좋아하는 난 겨울이면 어김없이 고구마를 찾는다. 포실포실한 식감에 적당히 노란 속살이 변함없이 정겹다. 고구마를 잘 씻어 오븐에 넣고 돌리니 온집에 금세 따스한 고구마 냄새가 퍼진다.


고구마가 말랑하게 익기를 기다리는동안 오빠와 나란히 소파에 앉아 할로겐등을 켜고 책을 읽는다. 나는 보라색 표지의 책, 오빠는 하늘색 표지의 책. 겨울담요를 나눠덮으며 온기를 나눈다. 이 조화로운 풍경에 음악이 빠질 수 없지. 오디오로 자이언티 신곡 "눈"을 틀었다. 눈이 실제로 내리는 것 같은 멜로디에 이문세의 피처링이라니. 화룡점정이다.


- 이 부분은 우리네 인생 같지 않아?
- 응. 현실적인 묘사라서 더 가슴이 먹먹하고 와닿는다.


열흘 앞으로 다가온 이사에 하는 거 없이 분주했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으면서 하루의 피로가 사르르 녹는다. 2년동안 살면서 집안 곳곳에 배어든 우리 둘만의 정취와 추억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고구마 향과, 눈내리는 음악과, 촤르륵 책 넘기는 소리가 하나로 포개져 이 집에 아로새겨진다. 특별할 거 없는 일상적인 하루가 이사 앞두고 괜히 애틋해진다.


삑삑-

아, 고구마 다 익었다.


오븐을 열고 닫혔던 뚜껑을 여니 다정한 연기와 함께 고구마 향이 한층 더 짙게 배어나온다.
그래. 꼭 이집이 아니어도 우리가 함께하는 그 어느 공간이든 겨울마다 고구마 향은 집안 가득히 퍼질거야. 그리고 우리는 또 그 계절에 맞게, 그 나이에 맞는 풍경에 물들어 살아가고 있을테지.

그래 분명 그럴거야. 그러니, 아쉬워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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