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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소 Nov 15. 2019

볕이 드는 창가로 홀린듯이 향했다

새로운 집으로 이사 온지 거의 한달이 되어간다. 아이 돌잔치와 이사라는 큰 이벤트를 10월에 두 개나 치고 육아를 최우선순위로 하루하루 살아내다보니 집정리도 여태 마무리하지 못한 채 벌써 11월 중순이다.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 모르겠다.


결혼 후 벌써 네번째 집. 매번 이사가 쉽지 않지만 2년 단위로 집을 옮겨다니니, 추억을 회상할 때마다 각각의 집이 주었던 분위기와 이야기가 시간이 지나도 기억에 생생히 남는다. 아이 키우기에 좁다고만 생각했던 이전의 문래동 집도 돌이켜보면 우리 가족의 가장 소중한 생애주기를 함께 했다. 임신, 출산, 육아의 기억을 모두 간직한 공간. 잠시 거쳐가긴 했지만, 소중하고 고마웠던 '우리집.'


여지껏 남향집에서만 살다가 처음으로 동향집을 얻었다. 18층이라 베란다 창밖으로 동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뷰도 좋았는데 살아보니 이 집의 매력은 은은한 햇빛에 있었다. (아, 빨래가 잘 안마른다는 건 단점이다..)


오전 6~7시경. 아직까지 새벽에 한번씩 깨는 아이를 달래주고 아이방에서 나오면서 베란다 창밖으로 먼동이 터오는 광경이 보인다. 떠오르는 해를 마지막으로 본적이 언제였더라. 비몽사몽 간이었지만 멍하니 일출을 바라다보았다.


그러다보니 얼마 전, 출산 후 처음으로 본 영화 <82년생 김지영>이 떠오른다. 비슷한 또래의 아이 키우는 엄마이자 경단녀, 아내이자 며느리, 딸. 현재 나의 사회적 역할과 완전히 똑같은 그녀의 일상을 엿보면서 참 많이도 울면서 크게 공감했다. 그 중 영화의 시작과 끝에 그녀가 석양을 바라보는 장면의 잔영이 내게는 제일 강렬했다. 아무 방해도 받지 않고 잠깐 지는 해를 바라보며 숨을 돌리고 싶은데 이내 베란다 창을 두드리며 엄마-를 부르는 아이.

영화 <82년생 김지영> 스틸컷


내게도 그런 경험이 있었다. 아이랑 놀아주다 무심코 내다본 창밖의 석양이 너무 아름다운데 그걸 바라볼 잠깐의 여유가 없다고 느낀 날. 놀아달라고 앵기는 아이에게 신경을 끄고 김동률의 '여름의 끝자락'을 틀어놓은 채 넋을 놓고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던 날이 있었다. 육아에 지쳐 몸과 마음이 유난히 힘들었던 날이었다.




이사온 이 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공간은 서쪽을 향해 난 부엌의 작은 창이다.

그 창밖의 햇빛을 보려 홀린듯이 부엌으로 향한 적이 있다. 날씨 좋은 날이면 약속이나 한 듯 어김없이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 3~4시의 눈부신 햇빛. 그 빛이 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 모를 정신없는 날, 나에게 작은 위안이 되어주곤 한다.


곧 사라지는 이 빛을 조금이라도 누리기 위해 설거지를 시작한다. 13개월 딸아이가 얼른 따라와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빛에 몰두하려 애쓴다. 밝은 햇빛에 비춰 튀어오르는 물방울이 참 싱그럽다. 이 시간만큼은 아이를 신경쓰지 않고 최대한 천천히,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그릇 하나하나를 닦으려 노력한다. 정말 별 거 아니지만, 설거지를 핑계삼아 누리는 나만의 찰나의 낭만. 이런 잠깐의 시간이 아이와 또 하루를 견뎌낼 힘을 주기도 한다.


이렇게 하루 해가 뜨고 지고, 그렇게 2년의 시간이 흐르면 우리는 또 새로운 보금자리를 찾아갈테고, 이제 제법 능숙하게 걸어다니는 나의 아이는 이 집을 뛰어나가는 날이 오겠지. 해인이에게도 해가 뜨는 동향과 해가 지는 서향의 햇빛을 은은하게 머금은 이 집의 빛이 기분좋은 기억으로 남길. 이 시기 나의 지친 심신을 달래주던 빛이 엄마에게도 참 고마웠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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