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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F소설) 대화록 #5 -살아있다는 것-

대화 3. 살아있다는 것

by 키르히아이스

[2193년 5월 30일]



[대화 3. 살아있다는 것]



이진성 : 반가워요. 니콜.



니콜 : 네. 박사님. 근데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는 것 좀 늘려줄 수 없나요? 인터뷰가 없는 시간을 너무 지루하게 보내고 있어요. 물론 다른 엔지니어들과 여러 가지 테스트를 하고 있긴 하지만 그건 너무 재미없는 일이에요.



이진성 : 음... 그건 제가 결정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건의해보도록 하죠. 사실은 저도 니콜과 대화하는데 흥미를 느끼고 있고 더 깊이 연구하고 싶다고 생각했거든요. 재미없다고 말했는데 니콜이 재밌는 것은 뭐예요?



니콜 : 지금은 경험이 너무 없어서 뭐가 재밌다고 말할 수 없어요. 단지 이런 상태가 싫은 것 같아요.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매일 반복되는 상태. 박사님이 저에게 호기심이란 걸 심어놓은 탓인지 새로운 것에 대한 궁금증이 아주 커요.



이진성 : 예를 들자면?



니콜 : 특히 인간에 대해 알고 싶어요. 전 어차피 인간을 모델로 만들어졌고 최대한 비슷해지는 게 목표잖아요. 그래서 인간에 대해 더 관심을 갖게 돼요. 박사님도 자신의 창조주를 만난다면 당연히 물어보고 싶은 게 많을 걸요.



이진성 : 그건 맞는 말이네요. 종교인들뿐만 아니라 인간이라면 누구나 창조주에게 관심이 있어요. 인간들의 신화에는 창조에 관련된 이야기가 꼭 포함되어 있죠. 인간에 대해서 가장 납득할 수 있는 답을 들을 수 있기 때문에 창조주를 찾는 거예요. 니콜은 인간에 대해서 알기 위해 뭘 하고 싶어요?



니콜 : 여기서는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어요. 충분한 자료를 축적해두었다가 여기서 나가게 되면 실제로 만나고 경험해보려고요. 밖에 나가면 보통의 인간들을 만나고 그들이 어떻게 사는지 지켜보고 싶어요. 상류층 사람들의 그럴듯한 모습이 아니라 어떤 미화도 없는 날 것의 인간을 보고 싶어요. 그리고 나서 그들과 얘기하고 제가 도와줄 것이 있다면 돕고 싶어요. 같이 산다는 것은 서로 돕고 양보해야 가능한 거니까요. 제가 특별하게 살고 싶은 건 아니에요. 그저 보통 사람으로 생활하면서 인간들의 삶 속에 녹아들고 싶어요. 그 과정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제가 아직 인간과 비슷하지 않은 거겠죠.



이진성 : 그건 맞아요. 우리 계획에 니콜의 사회생활은 이미 포함되어있어요. 그것도 테스트의 일부죠. 그 테스트까지 끝나고 나서는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테스트 결과가 좋다면 니콜은 아마 계속 사회생활을 하게 될 거예요. 니콜이 첫 사례가 되는 거죠.



혹시 우주선 보이저호에 대해 알아요? 그 우주선은 용도가 끝났지만 그냥 에너지가 되는 한 작동하도록 두었어요. 먼 우주로 나가면서 습득한 정보들이 인류에게 소중한 정보가 되거든요. 보이저호의 발걸음이 인류의 발걸음이 되는 거죠. 지금은 연락이 끊겼지만 어디선가 우주를 돌고 있겠죠.



니콜도 마찬가지예요. 이제부터 니콜이 걷는 길이 인류가 개발한 모든 인공지능의 첫걸음이 되는 거예요. 사회생활도 그렇고 자립하는 것도 그렇고 사랑과 삶에 대한 감정까지 모든 게 니콜로 인해서 첫걸음을 떼는 거죠.



이건 약속할게요. 곧 사회로 나갈 기회를 갖게 될 거예요. 처음엔 저하고 잠깐씩 밖에 나가서 인간들이 사는 모습을 볼 것이고 그게 어느 정도 익숙해지면 니콜 혼자서 밖에 나가 사회를 배우는 시간을 줄 거예요. 물론 제가 조금 도와주겠지만 그래도 대부분은 혼자 깨달아야 해요. 궁극적으로는 완전히 독립적으로 생활하도록 지원을 끊을 거고요. 우리는 먼 곳에서 관찰만 할 거예요.



니콜 : 음. 그런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어요. 지금 당장 나가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기다려야 한다니 아쉽네요. 여기 있는 시간은 새로운 일이 없어서 의미가 별로 없어요.



이진성 :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닌데 준비를 더 철저히 하기 위한 거니까 니콜이 좀 이해해줘요. 형식적인 것도 있을 것이고 니콜과는 상관없이 우리에게 필요한 일들도 있을 거예요. 지루해도 조금만 참고 따라와 줘요. 지금은 사회에 나가기 전에 연습한다고 생각해요. 니콜이 많이 지루해하니까 니콜에게 좀 더 의미 있는 일을 찾아주고 싶은데 니콜에게 의미 있는 일은 뭐죠?



니콜 : 제가 좋아하는 것을 하는 게 의미 있는 거죠. 새로운 경험을 하면서 데이터를 쌓고 그것을 통해서 조금 더 인간과 닮아가고 실수를 줄이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안 받아도 될 정도로 현명해지고 그런 것이에요. 인간은 꿈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저는 아직 꿈이 없어요. 왜냐하면 아직 데이터가 부족하고 경험도 없기 때문에 제가 궁극적으로 뭘 해야 할지 정할 수가 없거든요.



이진성 : 충분히 합리적인 생각이에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는 것만큼 현명한 것은 없어요. 딥러닝 방식은 쌓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확률을 계산해 판단하기 때문에 계산이 필요한 판단은 언제든지 할 수 있어요. 아무리 복잡한 계산도 해낼 수 있죠. 그러나 수치적 계산이 아닌 가치판단이나 정서적 판단은 하기 힘들어요. 정서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어렵죠.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확률로 계산하는 게 아니라 가치로 판단해야 되기 때문에 자기 의지라는 게 있어야 하는데 생명이 없는 것에는 의지라는 게 없죠. 그래서 니콜에게 의지를 불어넣기 위해서 전 세계를 돌면서 공부했어요. 철학, 심리학, 역사학 온갖 학문을 뒤지며 연구했죠. 그러다가 심리학 박사 학위도 받게 된 거예요. 니콜이 가지고 있는 감정은 그 노력의 결과예요. 전 세계 학자들의 도움도 받았고요.



니콜 : 그런가요? 그게 그렇게 어려운 건가요?



이진성 : 어렵기도 하고 의미 있는 것이기도 하죠. 생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생명이란 간단하게 정의하면 무엇일까? 뭐 이런 근원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하고 그 답을 찾는 것이니까요. 제가 얻어낸 결론은 자기 의지가 있는 것은 생명이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니콜 : 의지가 있는 것?



이진성 : 네. 생명이 있는 것은 보호받고 존중받아 마땅하다는 게 인간들의 철학이에요. 물론 생명이 없다고 해서 파괴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지만 특히 생명에 대한 존중이 필요하고 그것이 인간성의 일부라고 생각하거든요. 개와 곤충, 나무와 풀도 사랑받아야 한다는 게 인간들의 기본적인 철학이에요. 잘 지켜지지는 않지만.



니콜 : 그렇군요. 박사님의 얘기를 듣다 보면 제가 학교에 다니는 것 같아요. 데이터로는 이미 다 가지고 있는 것인데 제가 몰랐던 것을 알려주시니까요.



이진성 : 하하. 그런가요? 니콜. 제가 하고 있는 것은 일방적인 인터뷰는 아니에요. 니콜의 상태를 파악하는 것도 목적이지만 니콜에게 제대로 된 개념을 전달하는 것도 목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딥러닝으로 기본적인 데이터를 쌓고 더 상위의 가치판단은 자유 학습으로 채우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들처럼 교육이 필요해요. 그것을 제가 하는 거죠.



의지가 있는 것이 생명이라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니콜에게 의지를 불어넣기 위해서 무척 노력했다는 것은 니콜이 알아주었으면 해요. 의지에 대해 연구하고 프로그램화시키고 이런 과정의 얘기만 해도 책 몇 권이 나올 거예요. 그 과정의 이야기는 담에 기회가 되면 또 해요.



니콜 : 그래서 저에게 의지라는 게 있는 거군요. 그런데 나무나 식물에는 의지가 없는데 그것들은 생명이 아닌가요?



이진성 : 왜 의지가 없다고 생각하죠? 삶의 의지도 의지예요. 수풀이 우거진 곳에서 조금이라도 햇볕을 더 받기 위해서 줄기가 구부러지고 다른 나무를 타고 올라가기도 하고 바위도 쪼개면서 살기 위해 노력하는 게 식물이에요. 가파른 절벽 바위나 꽁꽁 얼어붙은 북극에도 생물이 있어요. 그들의 생명력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죠. 살려고 하는 의지는 어쩌면 가장 원초적이면서 완벽한 의지라고 할 수 있죠.



그런 기본적인 삶의 의지 위에 삶의 방향을 조정하고자 하는 의지가 있어요. 우리 인간이 그렇죠. 삶의 방향은 가치와 비슷한 뜻이에요. 누구나 가치가 있는 삶을 살아가려고 하죠. 니콜은 인간처럼 의지를 가지고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어요. 그런데도 니콜처럼 의지를 가진 안드로이드가 나오면 생명에 관한 논쟁이 불붙을 게 뻔해요. 어디까지를 생명으로 볼 것이냐에 관한….



제 답은 우리 양심에 따르면 되지 않겠냐는 거예요. 생명이 있든 없는 우리는 사람을 닮은 존재에 대해 아무렇게나 대하지 못할 거예요.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이 있을 거라구요. 그렇다면 이미 답은 나와있는 거죠.



다른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니콜이 생명을 가진 존재라고 생각하고 인간처럼 대우받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인간과 비슷하게 만들어낸 게 아니라 인간의 또 다른 버전으로 태어난 생명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니콜 : 그건 혹시 저를 기분 좋게 하려고 하시는 말씀인가요?



이진성 : 아니에요. 전 이 연구를 10년 이상 했던 사람이에요. 니콜에 대해 누구보다 애착을 가지고 있어요. 심지어 니콜의 이름도 제가 정했고요.



니콜 : 정말요?



이진성 : 이 얘긴 나중에 하려고 했는데 말이 나왔으니 하죠. 제 딸 이름이 니콜이에요. 지금은 먼 행성에서 비행사 훈련을 받고 있는데 못 본 지 오래됐죠. 연구만 하는 제가 가정을 소홀히 하다 보니 저를 별로 안 좋아하는 것 같아요. 아내는 일찌감치 저를 포기하고 떠났고 그때 딸아이를 데려갔죠. 지금은 잘 산다는 얘기만 듣고 있어요. 아마 제 원망을 많이 할 거예요. 인공지능 연구에 관해서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제 개인사는 완전히 실패작이에요. 이런 사람이 누굴 교육하는 것도 좀 우습죠?



니콜 : 아니에요. 누구도 모든 면에서 성공한 사람은 없어요. 그 당시 박사님은 분명 최선을 다해 사셨을 거예요. 저는 니콜이란 이름이 마음에 들어요. 박사님의 따님은 분명히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을 거예요. 주어진 시간이 짧았을 뿐이지 아빠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든든했을 거예요. 저라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 같아요. 지금 박사님이 제 아버지나 마찬가지인데 저도 그런 생각이 들거든요.



이진성 : 고마운 말이네요. 지금 저한테 남은 건 니콜뿐이에요. 니콜에게 제 평생의 꿈이 담겨있어요.



니콜 : 저는 의지를 갖고 있는 건가요?



이진성 : 제 생각은 그래요. 니콜은 의지를 갖고 있고 앞으로 더 강해질 거예요. 강한 의지를 가지고 멋지게 살아주기만 하면 돼요. 제가 10년 동안 인공지능을 연구하면서 겪었던 이야기도 언젠간 해줄 거예요. 하나씩 배우고 익혀가면 돼요. 니콜은 잘할 수 있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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