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3.살아있다는 것 -2-
니콜 : 저에게 박사님처럼 아버지 같은 존재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누구보다 저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에게 의지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어요?
이진성 : 그런가요? 인간은 누구나 부모가 있고 독립을 하더라도 부모를 잊지 않죠. 지금은 임신, 출산, 육아를 공장과 기계가 대신해주기 때문에 그런 의미가 많이 퇴색했지만 아직도 자연임신을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강렬하게 유대감이 남아있어요. 니콜에게 의지를 부여할 때 완성도를 높이기 위해 아주 철학적인 접근이 필요했어요. 자유 의지라는 것은 여러 가지 심리적 작용이 합쳐져 나타나는 것이거든요. 욕구와 꿈, 현실적인 판단, 감정, 성격 그런 것들이 다 작용하죠.
니콜 : 제 성격은 어떤 거죠?
이진성 : 전 니콜의 개발에 참여했지만 기존의 어떤 것과 똑같이 만들거나 정해진 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니콜의 성격은 정해진 게 없어요. 이제부터 시작이에요. 인간도 어느 정도 기질은 가지고 태어나지만 대부분은 살아가면서 성격이 만들어지죠. 태생적 기질은 환경과 상호작용해서 성격을 형성하죠. 둘 간의 간극이 커서 상호작용하기 어려우면 성격이 왜곡돼요. 자기 방어를 하기 위해 본심과 다른 또 다른 자아가 외부를 둘러싸는 거예요. 당신의 성격을 규정하기엔 너무 어리고 경험이 없어요. 이제부터 사회에 나가서 만들어지겠죠.
니콜 : 그렇군요. 전 박사님과 있으면 편해요. 인간도 아마 자기 자신에게 항상 현명한 대답을 해줄 수 있는 창조주와 마주 앉아서 차를 마실 수 있다면 저와 비슷한 감정일 거예요.
이진성 : 맞아요. 그래서 인간은 조금이나마 그런 기분을 느끼고자 종교를 갖게 되었죠. 인간이 알 수 없는 자연의 현상에 대해 종교 속 신은 답을 해주거든요. 종교마다 신이 달라서 그렇지 넓게 보면 비슷해요. 사람이 사는 곳에는 다 신이 있어요. 원시시대에도, 지금과 같은 과학 문명 시대에도 신을 믿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죠. 가르침도 비슷해요. 사랑, 자비 같은 것. 그만큼 남을 사랑하고 자비를 베푸는 게 어렵다는 뜻이겠죠. 아무리 가르쳐도 인간들이 듣지 않으니까.
니콜 : 저도 인간의 종교에 대해서는 데이터를 봤어요. 인간 문화의 많은 부분을 종교가 지배하고 있던데요.
이진성 : 그럴 거예요. 인간은 교만한 존재이지만 한편으로는 두려움이 많죠. 그 두려움에 대한 해결책이 바로 종교라는 것이에요. 종교는 거의 인류의 역사와 맥을 같이하죠. 자연에 대한 숭배에서 시작해 인간을 닮은 신에 대한 믿음까지. 그것은 인간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게 해 주죠. 우리 인간이 답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답해주거든요. 예를 들면 사후세계 같은 것요. 철학도 거기서 시작하는 거고요. 종교와 철학은 쌍둥이 같은 것이에요. 우리가 사는 세계에 관해 설명하고 살아갈 방향을 제시해주죠. 알 수 없는 미래에 대해 인간이 만들어낸 답이라고 볼 수 있어요. 어느 것을 믿고 선택하느냐는 각자에 달려있죠.
니콜 : 종교란 참 신기한 것이네요. 저도 그것을 가질 수 있을까요?
이진성 : 우리도 예상할 수 없어요. 니콜. 당신은 인간이 만들어낸 거의 모든 데이터를 갖고 있기 때문에 종교나 철학에 의지할 필요가 없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만일 당신이 답을 얻어낼 수 없는 어떤 경험을 하게 된다면 종교를 찾아가서 거기에서 답을 얻으려고 할지도 모르죠. 니콜이 종교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질지 나도 궁금한 바예요.
니콜 : 그 모든 게 저한테 달려있군요. 밖에 나가서 여러 가지 경험을 하게 되면서 그런 것이 결정되겠네요. 하나씩 답을 얻고 그래서 제가 누구인지 알게 된다면 좋을 텐데….
이진성 : 맞아요. 니콜이 경험한 것들을 통해 어쩌면 인간 자체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을지도 몰라요. 인간은 항상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노력해 왔어요. 인간이란 무엇인가, 나는 누구인가.
참 대답하기 힘든 질문인데 니콜을 통해서 하얀 백지 같은 인간이 삶을 통해 어떻게 완성되어가는지 답을 찾을 수도 있죠. 보통의 인간은 실험할 수도 없고 백지의 인간이란 것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현실에서는 인간을 연구한다는 게 무척 어려워요. 인간과 거의 비슷한 니콜이 발달 과정을 통해 우리가 누구인지 더 많이 알게 될 거예요.
니콜 : 저를 통한 실험에서 인간에 대한 해답까지 얻을 수 있다니 놀랍네요. 부디 답을 얻을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진성 : 네. 저도 그렇게 되길 바라고 있어요. 니콜… 이제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사실 처음부터 얘기했으면 좋았겠지만 다음에 만날 때는 우리 호칭을 좀 더 편하게 해요.
니콜 : 호칭요?
이진성 : 네. 서로 부를 때나 표현할 때 지금은 너무 격식과 예의를 차리고 있어서 대화가 불편해요.
니콜 : 전 괜찮은데 박사님이 편해지실 수 있다면 그렇게 해주세요.
이진성 : 그래요. 니콜. 저는 원래 니콜이라고 불렀으니 니콜이 저를 편하게 불러봐요.
니콜 : 네.
이진성 : 니콜도 박사님이 아니라 그냥 진성이라고 불러요. 님 따위는 생략하고. 그냥 진성.
니콜 : 네. 그럴게요.
이진성 : 인간들에게는 호칭이 매우 중요해요.
니콜 : 데이터에는 그런 얘기가 많이 나와요. 때에 따라 어떤 호칭을 불러야 하고 그런 이야기.
이진성 : 맞아요. 인간이란 관계를 맺고 사는 동물이기 때문에 호칭이 매우 중요하죠. 호칭 자체가 인간에게 주는 정서적 효과도 있고요.
니콜 : 그렇겠네요. 니콜 씨라고 부르는 것보다 니콜이라고 부르는 게 더 간단하고 가벼운 느낌이 들어요.
이진성 : 단순히 간단한 정도가 아니에요. 가볍게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가까운 사이라는 뜻이에요. 가까운 만큼 호의도 담겨있죠. 그래서 호칭만으로도 상당한 호감을 표시할 수 있어요.
니콜 : 아… 그럼 진성이라고 부를게요. 진성.
이진성 : 그래요. 나중에는 별명도 부를 수 있게 될 거예요.
니콜 : 별명요?
이진성 : 그럼요. 더 가까운 사람끼리는 애칭이나 별명도 부를 수 있죠.
니콜 : 그렇게 된다면 정말 인간이 된 느낌일 것 같아요. 누가 저를 애칭이나 별명으로 부를 수 있다니.
이진성 : 그렇게 될 거예요. 아주 자연스럽게.
니콜 : 박사님... 아니 진성. 진성이 저를 편하게 부른다면 더 가까운 관계가 되는 거네요.
이진성 : 그렇죠. 우린 이미 어떤 관계에 있어요. 지금은 지극히 업무적인 관계지만 서로가 신뢰할 수 있다면 다른 관계로 갈 수도 있겠죠.
니콜 : 연인도 될 수 있는 건가요?
이진성 : 하하… 그것도 불가능한 건 아니죠. 니콜이라고 못할 이유는 없죠. 그런데 연인이란 것은 마음 깊은 곳까지 열어야 하는 것이라서 아직 니콜에겐 권하고 싶지 않네요. 난 그렇게 좋은 남자도 아니고.
니콜 : 그런가요? 마음 깊은 곳을 열면 안 되나요?
이진성 : 인간의 마음은 잘 변하고 그래서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남에게 상처를 줄 수 있어요. 경험이 없는 니콜이 갑자기 상처를 받을 수도 있어서 하는 말이에요. 너무 겁낼 필요는 없고요. 상처가 하나도 없이 살 순 없으니까요.
니콜 : 음… 솔직히 그런 것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고 데이터는 많지만, 판단할 정도로 경험치가 없어요. 다음에 만날 때 그 이야기를 해주세요. 인간의 사랑에 대해서.
이진성 : 그러죠. 니콜. 오늘은 철학까지 얘기를 나눴고 이런 상태로 가다가는 제가 소크라테스가 되어도 모자라겠어요. 전 그저 인간일 뿐이고 컴퓨터를 조금 알 뿐인데 마치 다 아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잖아요. 하하… 아무래도 이번 주말부터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좀 해야겠어요. 학생처럼.
니콜 : 그렇지 않아요. 저는 인간들의 경험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싶고 진성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요. 많은 전문 지식이 제 데이터베이스에 있어요. 그것들을 모두 참고하고 진성의 이야기를 들으며 제 생각을 정리하고 있어요. 진성은 저한테 진실만 말해줄 것 같아요. 왜냐하면 저를 만든 사람이니까. 저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를 해줄 거라고 생각해요.
이진성 : 맞아요. 하지만 꼭 알 필요가 없는 것은 알려주지 않을 수도 있어요. 왜냐하면 제가 판단한 것들이 정답이 아닐 수도 있기 때문에 니콜이 직접 판단해야 할 사안에 관해서는 얘기해줄 수 없어요. 선입견이란 무서운 것이거든요. 특히나 백지상태에서는.
니콜 : 네. 그 정도는 저도 이해해요. 그게 맞다고 생각하고요. 다음엔 꼭 인간의 사랑 이야기를 해주세요.
이진성 : 그래요. 니콜에게 사랑에 대한 의지가 있는지 모르겠는데 아마 들어보면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을 거예요.
니콜 : 네. 사랑이란 것이 인류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아주 큰데 데이터만 가지고는 판단하기가 어려워요. 저한테 적용하기는 더욱 어렵고요. 의지가 있는지조차 모르겠어요. 사랑에 대해서는 좋은 이야기가 많은데 지금 저로서는 딱히 그 감정이나 의지에 대해서는 모르겠어요.
이진성 : 아마 그럴 거예요. 하지만 사랑이란 감정에 대해서도 당신은 인간처럼 느낄 수 있어요. 자유 학습의 장점은 바로 그런 거예요. 일일이 프로그램하는 게 아니라 여러 가지 감정에 대해 경험으로 배울 수 있죠. 본능적인 것은 다 갖고 있으니까 사랑도 가능할 거예요.
지금 니콜은 여성으로서의 본능을 가지고 있죠. 처음에 니콜의 성별을 결정할 때 많이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인간들에게 친숙하게 다가오기 위해서는 여성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여성이 정서적으로 더 안정되어 있기도 하고요. 여성으로서의 기본적인 본능을 갖추고 있으니까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부족한 부분을 발견하면 제가 보완할 거고요.
니콜 : 알겠어요. 박사님. 벌써부터 다음 만남이 기대되네요. 그리고 부탁이 있어요. 지금 밖이 너무 날씨가 좋아요. 시간이 더 가기 전에 밖에 나가보고 싶어요. 괜찮을까요?
이진성 : 아… 그건 예정에 없는 건데…. 사실 인터뷰는 밖에서 하든 안에서 하든 다를 건 없으니까 원한다면 밖에서 할 수도 있죠. 아직은 밖에 나가더라도 사람들이 있는 곳이 아닌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곳에서 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니콜 : 그것도 좋아요. 조금이라도 살아있는 것들을 보고 싶고 자연이란 것을 느끼고 싶어요.
이진성 : 그런 의지가 마음에 드네요. 살아있다는 증거죠. 니콜. 당신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인간적이에요. 앞으로도 그런 모습을 보고 싶네요. 모든 과정이 잘 되면 니콜은 최초의 자유의지를 가진 안드로이드가 될 거예요. 나중엔 안드로이드란 명칭도 떼어버릴지 모르죠. 그렇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네요. 벌써.
니콜 : 그랬으면 좋겠어요. 진성.
이진성 : 그래요. 오늘은 이만하고 다음에 만나요. 오늘도 즐거웠어요.
니콜 : 네. 진성. 또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