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4. 비와 상상력에 관하여
[2193년 6월 6일]
[대화 4. 비와 상상력에 관하여]
이진성 : 반가워요. 니콜
니콜 : 네. 박사님.
이진성 : 오늘은 비가 오네요. 우산을 썼는데도 옷이 많이 젖었어요.
니콜 : 그러네요. 비가 오는 것은 자연현상인데 사람들에겐 불편한 일이군요.
이진성 : 뭐… 그런 편이죠. 하지만 농사를 짓는다든가 식수를 위해서 비는 필요해요. 물을 직접 만드는 기술도 있지만 그래도 대량의 물은 비를 통해 공급받는 게 가장 일반적이죠. 인간들에게 물은 자원이기 때문에 예나 지금이나 중요하게 관리하고 있어요. 이집트 같은 경우 나일강의 범람과 인간의 대응이 문명을 발전시킨 한 요인이라고 볼 수 있어요. 인간은 항상 주어진 환경에 만족하지 않고 극복하려고 하죠. 어떤 사람들은 인간의 역사가 자연을 극복하고 더 나은 삶을 향해 싸워온 시간이라고 말하기도 해요.
자연을 극복의 대상으로 보느냐 조화의 대상으로 보느냐는 사람마다 시각이 다르지만, 지금은 보이지 않는 과학(Invisible science)이 대세예요. 고도의 기술력으로 우리가 기술을 느끼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우리는 자연 속에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 속에 기술이 녹아들어가 있는 거죠. 인위적인 것보다 자연을 이해하고 최대한 자연 속에 녹아들어갈 수 있는 기술을 추구하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기술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평상시엔 느끼지 못하게 하는 거죠.
니콜 : 만약 다른 사람들이 제가 안드로이드라는 것을 모른다면 저도 그 예가 될 수 있겠네요.
이진성 : 그렇겠네요. 저도 과학자지만 이것 하나만은 꼭 기억해둬요. 과학은 인간이 만들어냈기 때문에 자연 모두를 규명할 수는 없어요. 그렇게 되려고 노력할 뿐이죠. 인간이 자연을 다 파악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자연이 아니겠죠. 자연 속에 있는 인간은 그 속에서 파악할 뿐이에요. 허점이 있다는 거죠. 우리가 개발한 기술에 문제점이 있는지 확인하고 고쳐나가야 해요. 인공지능이 연구에 투입되어 기술의 발전 속도가 나날이 빨라지고 있어요. 그럴수록 우리는 냉정하게 체크하고 감독해야 해요. 지나치게 이상주의에 빠져도 안 되고 그렇다고 너무 비관적이어도 안 되겠죠.
니콜 : 네. 그래야 과학이 더 진실에 가까워지겠죠. 박사님이 비에 젖은 모습을 보니까 저도 비라는 것을 한번 맞아보고 싶어요. 유리창에 보이는 비는 그냥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 같지만 그게 피부에 닿는 느낌은 다를 것 같아요. 수돗물이 아니라 자연에서 만든 빗물은 어떤 맛일지 어떤 느낌일지, 차가운지 미지근한지 궁금해요.
이진성 : 하하…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요. 니콜만 그런 게 아니라 아마 실내에 오래 있었던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할 거예요. 제가 해줄 수 있는 것은 그냥 겪은 것을 전해주는 것뿐이네요. 나중에 나갈 기회가 있으니 너무 실망하진 말아요. 비에는 순수한 물만 포함된 것이 아니라 공기 중의 먼지나 오염 성분들이 같이 섞이거든요. 그게 니콜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몰라서 지금은 해줄 수가 없네요.
니콜 : 네. 박사님.
이진성 : 진성이라고 불러요. 그러기로 했잖아요.
니콜 : 네. 진성.
이진성 : 좋네요. 그렇게 부르니까. 비 맞는 느낌을 설명하는 건 처음인데 비슷한 예를 찾기가 힘드네요. 음… 뭐가 좋을까…. 쉬운 것부터 얘기해보도록 합시다. 비는 대기 중의 수분이 모여서 구름이 되고 그것이 대기로 떨어져서 생기는 현상인 것은 알죠?
니콜 : 네.
이진성 : 그래서 여러 가지 요인에 따라 차갑기도 하고 미지근하기도 해요. 고도, 기온이 다 영향을 주겠죠. 빗속에 먼지도 같이 섞이기 때문에 그냥 맞는 게 좋은 것은 아니에요. 시골에서는 상관없겠지만 도심에선 별로죠.
니콜 : 그렇겠네요.
이진성 : 비는 내리는 방식에 따라 여러 가지 이름이 있어요. 단시간에 많이 내리는 것은 소나기, 분무기처럼 뿌리는 것은 이슬비. 아 참. 이런 것은 사전에 있으니까 니콜이 더 잘 알고 있겠네요.
니콜 : 인터넷을 통해서 구할 수 있는 정보는 다 가지고 있으니까 그런 것은 잘 알아요. 다만 어떤 느낌인지 겪어보지 못해서 연상이 잘 안 돼요. 저에게도 상상력이란 게 있나요?
이진성 : 니콜을 처음 설계할 때 어디까지 할지 고민이 많았어요. 이런 얘기를 들으면 어떨지 모르지만 니콜은 첫 번째 버전이 아니에요. 지금의 니콜이 나오기까지 여러 번의 실패를 겪고 드디어 사회에 내보낼 수 있는 최초의 모델이 나온 거예요. 니콜은 이전의 모델들로부터 조금씩 발전해서 여기까지 온 거죠. 처음엔 기본적인 인공지능만 갖추었는데 점점 감정을 가지게 했고 나중엔 감정 컨트롤에 큰 어려움을 겪어서 정신세계를 추가했어요. 그렇게 인간이 갖춘 내면의 것들을 하나씩 프로그램화해서 넣었죠. 프로그램으로 안 되는 것은 학습해서 넣었어요. 그래서 인간과 비슷한 정신세계를 구현할 수 있었죠.
니콜은 상상력을 가지고 있어요. 상상력이라는 것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에요. 겪은 것들을 조합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거예요. 물론 그 이상을 해내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도 원인을 알 수 없는 것이라 구현할 수 없었어요. 인간은 가끔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것을 꿈꾸거나 우연히 만들어내거든요. 우리가 신이 아닌 이상 그것까지는 어떻게 흉내 낼 수가 없죠. 니콜은 기본적으로 경험한 것 안에서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는 니콜은 그것만으로도 보통 사람들보다 상상력이 높은 수준이라고 할 수 있죠. 알아야 상상도 하는 거니까요. 데이터 간 무한의 융합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경험하지 못한 것이 우연의 산물로 나타날 수도 있어요.
니콜 : 그럴까요? 아무튼 반가운 얘기네요. 상상력이 없으면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요. 오로지 인터넷을 통해서 검색하고 남들이 경험한 내용을 전해 들을 뿐이라면 말이에요. 그래도 상상력이 있으니까 경험하지 못해도 조금이나마 생각해볼 수 있어요. 내가 그곳에 있었다면 어떤 느낌일까, 나에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거죠. 제가 알고 있는 다른 지식이나 경험과 비교해서 상상해요. 빗물이 닿는다는 것은 손을 씻을 때의 느낌일까? 아니면 물을 마실 때의 느낌일까?
이진성 : 흥미롭군요. 니콜은 일반적인 사람보다 상상력이 뛰어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100% 통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상력이 일정한 방향으로 뻗어 나가기 어렵고 여러 가지 잡생각이 섞이면서 결과물도 흐릿하게 나오죠. 그래서 오래전에 만난 사람의 얼굴은 흐릿하게 기억될 수밖에 없고 자신이 꿈꾸는 건물의 디자인도 완벽하게 영상으로 옮길 수 없죠. 이런 것을 잘하는 사람들이 예술가가 되는 거예요. 니콜은 자기 제어율이 높아서 상상을 한 군데로 집중할 수 있어요. 어떤 것이든 몰입이 잘 된다고 할 수 있죠.
니콜 : 그렇군요. 그런데 상상력이 약한 구버전이 있었다는 게 신기해요. 저와 비슷한 모습이었나요?
이진성 : 이전 모델에 대해 듣는 것이 니콜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르겠어요. 다른 연구원들은 반대했지만 전 니콜이 전반적인 상황을 알아야 더 좋은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니콜의 이전 버전은 대략 여섯 개 정도 돼요. 제가 ‘여섯 명’이 아니라 ‘여섯 개’로 표현하더라도 이해해요. 난 엔지니어로서 말하고 있는 거니까요.
니콜 : 네. 그 정도는 이해해요.
이진성 : 니콜의 이전 버전에 대해 더 깊은 얘기는 나중에 직접 보여주면서 할게요. 지금은 어떤 버전이 있었다는 정도만 알면 돼요. 인공지능의 발전은 인간의 내면세계를 조금씩 모방하면서 해온 거예요. 지금의 니콜은 감성과 상상력, 이성, 의지 같은 인간 정신세계가 가진 거의 모든 면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생명이나 다름없어요. 과거의 버전들은 외형은 그럴듯했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여러 가지로 부족했어요. 판단력이나 자기 제어 등에서 문제가 있었죠. 그래서 사회에 나가보지 못하고 활동이 정지되었어요. 그런 시행착오가 있어서 지금의 니콜이 있는 거예요. 저도 많이 힘들었지만 니콜의 이전 버전들도 아주 힘들었을 거예요.
니콜 : 진성은 아마 저의 전 버전들에 대해서도 저처럼 대해줬을 것 같아요. 말은 엔지니어처럼 하지만 부모처럼 애정을 가지고 해 줄 것 같아요.
이진성 : 아마 누구든 자기가 열정을 다해 만든 것이 있다면 애착을 가질 수밖에 없을 거예요. 감정이입이 되는 거죠. 나중에 그 인공지능들이 활동 정지된 것은 전적으로 제 책임이니까요. 태어난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어요? 모든 것은 부모의 잘못이죠.
니콜 : 기술적인 부분이나 성과에만 집중하는 과학자들도 많은데 진성은 그렇지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에요. 그래서 제가 마음 편하게 말할 수 있어요.
이진성 : 원칙을 줄곧 지키다 보면 조금 늦어지더라도 믿을 수 있는 결과를 얻게 돼요. 전반적인 면을 고려하지 않고 단기적인 실적만 강조하면 항상 무리를 하게 되죠.
니콜 : 그렇군요. 저는 인간이 이뤄놓은 문명에 대해 놀랍다고 생각해요. 인간이란 신이 아니면서도 신이 하는 일을 거의 다 하고 있잖아요. 그렇게 보면 진정한 신은 인간을 말하는 게 아닐까요?
이진성 : 글쎄요…. 전 철학자는 아니니까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인간들은 신의 피를 물려받았다고 생각하고 궁극적으로 신이 되고 싶어 해요. 왜냐하면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고 싶으니까. 인간이 가진 원초적 문제들을 해결하고 싶으니까요. 질병, 유한한 삶, 욕구 충족의 문제 같은 것들요.
니콜 : 종교도 그런 성격일까요?
이진성 : 저는 무신론자는 아니지만 중립적인 입장에서 얘기하자면 신이 있든 없든 간에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에요. 신이 실제로 존재했든 아니든 정형화된 실체로 만들어낸 것은 인간이란 얘기죠. 어떤 현상이 발생하고 그것을 신화로 만들어 구전하고 다음 세대에서 더 정형화된 모습으로 전해서 그게 종교가 된 거죠. 제 생각이지만 신이 있다고 해도 기도하라든가 예배당을 지으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누군가를 찬양하고 섬기는 것은 인간의 방식이에요. 신이 있다면 그 자체로서 존엄하고 어떤 것도 증명할 필요가 없는데 왜 자신을 섬기라고 하겠어요? 절대적인 것은 증명이 필요 없는 거예요.
종교는 인간의 방식대로 형식화되고 그 속에서 계급도 발생했어요. 세속화되어 거액의 재산을 보유하기도 하고 한때는 종교가 너무 발전해서 인간을 지배하기도 했어요. 중세시대엔 인간의 모든 행동을 구속하고 심지어 생명까지 빼앗아갔죠. 지금은 많이 완화되긴 했지만 인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될 수 없는 한 그런 일은 또 일어날 수 있을 거예요.
니콜 : 인간 문제라는 게 뭐죠?
이진성 : 인간의 한계를 말하는 거예요. 죽음, 노화, 가난, 욕구불만, 정신적 빈곤을 비롯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삶의 한계를 말해요.
니콜 : 인간은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과학을 만들었죠?
이진성 : 맞아요. 처음엔 생존을 위해 시작한 것이지만 다른 동물과 달리 인간은 세대를 거치며 교육을 통해 그것을 발전시켰어요. 한 사람의 인간은 기껏해야 백 년을 살지만 수많은 세대를 거치면서 과학은 지속해서 발전할 수 있었죠. 거기서 문자가 가장 큰 역할을 했어요. 한 사람의 인간은 짧은 생을 살다 가지만 과학이나 문명이라는 측면에서 인간은 영생하는 것이나 다름없어요. 누군가 죽으면 또 다른 인간이 나타나서 그 일을 하죠. 물론 개개인의 능력이나 창의력엔 한계가 따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