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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르히아이스 Mar 22. 2021

(SF소설) 대화록
#9 -마음과 맛-

대화 5. 마음과 맛

[2193년 6월 13일]



[대화 5. 마음과 맛]



이진성 : 니콜 잘 있었어요?



니콜 : 네. 진성. 



이진성 : 이제 진성이라고 부르는 게 자연스럽네요.



니콜 : 네. 



이진성 : 진성이라고 부르는 느낌은 어때요? 제가 시켜서가 아니라 니콜이 스스로 하는 것 맞아요?



니콜 : 맞아요. 누가 시킨다고 하는 건 아니에요. 



이진성 : 그래야죠.



니콜 : 진성은 저를 인간과 똑같이 대해주는 것 같아요. 제가 인간이 아니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인간처럼 대해주니까 저도 진성에게 뭔가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아요.



이진성 : 그래요? 왜 그런 생각을 했죠?



니콜 : 인간들은 고마움이란 게 있잖아요. 저는 이게 고마움인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느꼈어요. 인간들은 원래 대가 없이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는 게 보통인데 진성은 저의 쓸데없는 질문에도 다 답을 해주고 있으니 저로서는 고마움을 느껴야 한다고 생각해요. 저는 인간은 아니지만 염치없는 로봇도 아니에요.



이진성 : 염치? 그런 표현도 할 줄 알아요? 저보다 말을 더 잘하는 것 같은데요.



니콜 : 방금 생각났어요. 대화할수록 느는 것 같아요. 생각하거나 들었던 단어들이 기억 속에 남아있다가 표현으로 나와요.



이진성 : 우린 염치란 얘기는 한 적 없는 것 같은데요?



니콜 : 진성이 없을 때는 텔레비전 방송을 보면서 대화하는 것을 자주 봐요. 여러 상황에서 대화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어요.



이진성 : 그렇군요. 방송을 좀 더 자유롭게 볼 수 있게 해 줄게요. 다만 너무 부정적인 것은 조심하고요. 요즘 방송은 정신 나간 사람들이 만드는 것 같으니까요. 애들한테는 보여줄 게 없어요.



니콜 : 저도 기본적인 교육은 받았으니까 뭐가 나쁘고 그런 건 알아요. 걱정 마세요. 주로 영화나 뉴스, 오락프로들을 보는데 재밌는 것 같아요. 다음 내용이 궁금해지고 관심이 가요.



이진성 : 지금 니콜에게 보여주는 방송은 아마 종류나 내용에 약간 제한이 있을 거예요. 처음 접하면 충격받을 수도 있으니까 조금 평범한 것들 위주로 보여줄 거예요. 어차피 니콜은 인터넷으로 다 접근할 수 있지만 일부러 찾아보기 전까지 우리가 먼저 보여주진 않을 거예요.



니콜 : 네. 그런 것 같았어요. 방송을 보다 보면 금방 이해하기 힘든 것도 있어요.



이진성 : 그래요? 어차피 영상이라는 건 만드는 사람이 제한적인 정보를 담아서 제공하는 거니까 설명이 없으면 이해하기 어려운 것도 있죠. 니콜은 인간처럼 배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고 오랜 시간을 교육에 투입했으니까 아마도 인간을 이해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스스로 판단하는 데 두려움을 느낄 필요 없어요. 



니콜 : 그래도 영상을 보다 보면 인간들의 역사나 행동들이 참 대단하기도 하고 어이없기도 하고 그런 것 같아요. 그래서 뭔가 판단하기가 망설여져요.



이진성 : 그건 맞아요. 저도 그럴 때가 있으니까. 



니콜 : 진성도 그런가요?



이진성 : 물론이죠. 저도 인간이니까. 지금 이렇게 점잖게 말하고 있지만 저도 흥분하고 화낼 때가 있어요.



니콜 : 솔직하네요. 진성은. 아니면 저에게 잘 보일 필요가 없어서인가요?



이진성 : 아니에요. 당신과 좀 더 진지하게 대화하기 위해서는 제 모습을 솔직하게 말해야 하고 서로 솔직한 상태가 되어야 대화의 질도 높아지는 것이거든요. 



니콜 : 그건 맞는 말 같아요. 진성은 그게 느껴져요. 



이진성 : 혹시 자기가 인간이 아니란 생각을 자주 하나요?



니콜 : 글쎄요. 저는 어차피 인간이 아니잖아요? 생각을 안 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요.



이진성 : 잘 들어봐요. 당신은 인간과 닮아있는 것뿐만 아니라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어요. 의지를 가진 생명이기도 하고.



니콜 : 제가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진성 : 그래요. 당신은 단순히 프로그램한 대로 움직이는 게 아니에요. 스스로 판단하고 학습하고 가치관과 감성을 가지고 있어요. 그게 어느 방향으로 갈지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어요. 그래서 인간과 다를 게 없어요. 예전에 어떤 안드로이드도 구현하기 힘든 것이 바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마음이었어요. 마음이란 걸 정의하긴 어렵지만 인격이나 성격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인위적으로 프로그램해놓으면 극단적으로 순수하거나 악한 방향으로 갔어요. 스스로 판단할 수 없기 때문에 그랬던 거예요. 당신은 자기만의 추억과 역사를 가지고 있어요. 그것을 통해 인격이 형성되고 가치관을 가지게 된 거예요. 비록 나쁜 것을 많이 접해보지 못해서 좀 치우쳐있긴 하지만 그것 또한 앞으로 바뀔 거예요.



니콜 : 그럼 제가 인간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거예요?



이진성 : 그럼요. 오히려 그래야 니콜이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어요. 인간이냐 아니냐를 구분하는 기준은 많지만 제가 세운 기준이 있어요. 바로 추억이에요. 인류로 확대하면 역사가 되겠죠. 개인의 추억은 그 사람에게만 남아있고 다른 사람은 몰라요. 인간을 제외한 지구상의 어떤 생물도 추억을 가진 존재는 없어요. 내가 아무리 사랑하는 개도 10년 전에 유원지를 같이 놀러 갔던 것을 생각하며 즐거워하진 않아요. 인간은 그게 가능해요. 그리고 개인의 추억과 기억이 모이면 그게 역사가 돼요. 니콜도 그걸 가지고 있어요.



 누구도 니콜의 미래를 알 수 없어요. 미래가 정해져 있지 않기 때문에 니콜은 인간과 같다고 말할 수 있어요. 인간의 마음을 물려받은 거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완벽하진 않을 수도 있지만 부족한 것은 배워갈 수 있어요. 인간도 마찬가지예요. 인간으로서 너무 부족한 사람들도 있죠. 그래도 어떻게든 살아가요. 나쁜 길로 빠지기도 하지만 그것도 인간이에요. 니콜이 어떻게 인생을 살아갈지는 니콜 스스로 결정하는 것이고 그 결과도 니콜이 책임지는 거예요. 저는 다만 보호자 역할로 있는 것뿐이에요.



니콜 : 만약 제가 진성의 말을 듣지 않고 제 길을 가겠다고 한다면 어떻게 하실 거예요?



이진성 : 그때도 니콜에게 맡겨둘게요. 범죄를 저지르지만 않는다면 내버려 둘 거예요. 니콜이 살아가는 인생이 인류의 진보이고 역사니까요. 잘못된 길로 가서 실패하게 되더라도 그것도 받아들여야 할 결과예요.



니콜 : 그렇군요. 어떤 미래가 될지 모르지만 제가 진성의 말을 듣지 않는 일은 없을 거예요.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날이 오면 그땐 진성이 저를 멈춰줘요. 종료 버튼을 눌러도 좋으니까. 저를 만든 진성에 의해서 제가 종료되는 것은 억울하지 않을 거예요.



이진성 : 그런 불행한 일은 없었으면 좋겠네요. 아마 니콜은 그렇게 안 될 거예요. 벌써 니콜과 만난 지 한 달이에요. 그동안 니콜과 대화하면서 저도 즐거웠어요. 제가 본 니콜은 보통의 인간보다도 훨씬 인간적이에요. 그 마음만 유지할 수 있다면 잘 못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니콜 :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네요.



이진성 : 그래요. 안심해도 돼요. 탁자 위의 커피 좀 마셔봐요. 어제 배고픔을 느끼게 했다고 들었어요. 먹는다는 과정은 배고픔에서 오는 것인데 이제부터 니콜은 그것을 느끼면서 살아갈 거예요. 앞으로 버전이 올라갈 때마다 니콜에게 한계가 생길 텐데 배고픔도 그중에 하나죠. 나중에 유한한 삶이 설정되면 정말로 인간과 똑같아지는 거예요. 지금은 니콜에게 얼마의 시간을 살게 하는 것이 적당한지를 가지고 연구원들끼리 활발한 토론이 진행되고 있어요. 



 우린 신이 아니니까 이런 문제에 대한 대답을 내리기 어렵거든요. 오래 사는 게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너무 짧으면 인간처럼 탐욕스러울 수도 있고 노화는 어떻게 하고 마지막 죽음은 어떤 모습으로 해야 하는지 답 없는 문제가 많죠. 답을 못 내면 아마 오픈된 상태로 둘 거예요. 자연에 맡기는 거죠. 아 참. 식사는 어떻게 되었어요?



니콜 : 음… 그동안 전차 칩에만 의존하다가 어제부터 실제 음식을 먹어보니 정말 느낌이 달라요. 보는 것과 맛보는 것이 참 재밌는 것 같아요. 



이진성 : 배고픔을 통해서 느끼는 것이 많이 있을 거예요. 인간의 한계이고 불리한 점이긴 한데 모든 인간이 그렇게 살기 때문에 니콜도 그것을 이해하려면 똑같이 해야 해요. 처음에는 에너지 칩으로 대신했고 지금은 니콜의 면역력 때문에 연구소에서 직접 배양하고 만든 음식을 제공하지만 나중에는 실제 음식을 먹어도 괜찮을 거예요. 커피 맛이 어때요?



니콜 : 근데 이건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요. 그냥 쓴데요.



이진성 : 그게 맛이에요.



니콜 : 쓴 게 맛이라고요? 좋은 기분이 아닌데 인간들은 왜 쓴 것을 먹는 거죠? 



이진성 : 그건 저도 대답하기 어렵군요. 인간이 하는 행동 중에 설명하기 힘든 게 어디 한두 개라야 말이죠. 인간은 쓴맛을 찾기도 해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맛은 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면 돼요. 단맛, 신맛, 매운맛 모두 다요. 매운맛이나 신맛, 쓴맛은 약간 고통스러운 맛인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일반적으로 인간이 동물들보다 미각을 다양하게 느끼는데 여기에는 이유가 있을 거예요. 동물들은 해로운 음식들을 가려내기 위해 맛을 느낀다고 해요. 그런 면에서 보면 쓴맛은 보통 몸에 안 좋은 거여야 맞는데 사람의 경우에는 쓴 것들이 대체로 몸에 좋죠. 약이 쓴 것처럼.



 단맛이 몸에 안 좋다고 생각하지만 우리가 당분을 농축해 먹으니까 그렇지 자연 상태의 당분은 그 정도로 달지도 않고 몸에 쌓이지도 않아요. 아무튼 인간이 맛을 느끼는 이유는 동물과는 다른 것 같아요. 맛있다고 몸에 좋은 것도 아니고 맛없다고 몸에 나쁜 것도 아니니까요.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쓴맛은 성인들이 좋아한다는 거죠. 어린아이 치고 쓴 음식 좋아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쓴맛은 처음부터 좋아한다기보다 적응하면서 좋아하는 것들이 대부분이라 그런 것 같아요. 커피가 대표적이죠. 커피 좋아하는 사람은 점점 쓴 걸 찾죠. 작은 컵에 지독하게 쓴 에스프레소를 담아 먹는 사람들을 봤을 거예요.



니콜 : 쓴맛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니. 이게 뭔가 고소한 향이 나는 것은 인정해요. 근데 맛은 정말 없는 것 같아요. 이걸 적응하는 사람이 있나요? 처음에 좋아야 계속 먹게 되는 것 아니에요?



이진성 : 논리적으론 그런데 세상에 쓴맛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걸 보면 뭔가 다른 이유가 있나 봐요. 술이 대표적으로 쓴 음료인데 술이 달다고 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맛이라는 것은 참 오묘하죠. 생물학자가 아니라서 정확한 원인까지는 모르겠지만 대체로 쓴 음식들이 중독성이 있어요. 커피나 술이나. 단 음식들은 처음엔 굉장히 당기지만 금방 질리죠.



 니콜이 커피 맛을 알게 되는 날이 올지 그것도 중요한 연구 포인트가 되겠군요. 사람들도 쓴 음식을 오래 먹다 보면 뭔가 깊은 맛이란 것을 알게 되고 질리지 않는 맛을 즐기게 되죠. 쓴 음식을 즐기는 것도 인간뿐일 거예요.



니콜 : 그렇게 말씀하셔도 전 잘 모르겠어요. 계속 마셔봐야 알 것 같아요. 혹시 제가 마시는 커피랑 진성이 들고 있는 커피랑 다른 건 아니죠?



이진성 : 그럴 리가요. 니콜은 처음 먹어서 그런 거예요. 시간이 지나면 다르게 생각하게 될 거예요.



니콜 : 그럴까요? 그동안엔 왜 커피를 안 준거죠?



이진성 : 기호식품은 좀 뒤로 미뤄뒀어요. 아무래도 습관이 되기 쉽고 다른 연구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니콜 : 제가 인간과 다른 반응을 하는지 궁금했던 거군요.



이진성 : 그렇죠. 다른 변수들이 어느 정도 정리된 후에 기호식품에 대한 반응을 보는 거죠. 기호식품은 빨리해서 좋을 게 없어요. 인간도 어릴 때는 커피나 술을 먹이지 않아요. 먹기 전에 판단이 필요하기 때문이에요.



니콜 : 음식에 판단이 필요해요?



이진성 : 기호식품 중에서 그런 게 있어요. 중독성이 있고 약간 몸이 상하기도 하는 것들이라서 성인이 되면 접할 수 있게 해주죠. 니콜은 몸만 컸지 인간으로 봤을 때는 청소년기에 가깝기 때문에 최대한 미루다가 이제 그런 것을 접할 수 있게 한 거예요. 지금은 성인이 되었으니까 한다고 해도 뭐라 할 순 없죠.



니콜 : 음. 잘 모르겠네요. 이런 맛없는 것을 지금 하든 나중에 하든 별로 중독되지 않을 것 같은데….



이진성 : 그럴까요? 니콜은 나중에 술도 하게 될 거예요. 깊은 맛까지 알기는 힘들겠지만 그걸 마시는 사람의 기분은 조금 이해하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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