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5. 마음과 맛 -2-
니콜 : 저도 술을 마시면 취하게 되나요?
이진성 : 그 부분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어요. 니콜의 소화기관을 계속 업그레이드시켜갈 텐데 인간과 되도록 같게 하려고 해요. 알코올은 뇌와 신경계에 영향을 많이 주는데 그 부분에 있어서 니콜이 느끼는 정도는 인간과 좀 차이가 있어요. 니콜의 신경은 나노 칩들이 통제하고 있으니까 술을 먹는다고 정신을 잃거나 비틀거리지는 않을 거예요.
만약 니콜이 가진 나노 칩을 생체칩으로 바꾼다면 술의 효과가 완전히 나타나겠죠. 하지만 지금은 그런 기술이 없으니 걱정 안 해도 돼요. 다만 신경전달 물질의 효율 저하로 취한 효과가 나타나긴 할 거예요. 극적이진 않겠지만.
니콜 : 술은 무슨 맛일지 궁금해요. 인간의 문명과 역사를 같이한 음식이니까 뭔가 특별한 맛이 있을 것 같아요.
이진성 : 술에 대해 말하자면 하루가 부족할 정도로 인간에게 큰 영향을 미친 음식이죠. 이런 말도 있어요.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면 인간은 술을 만들었다. 이 말만 봐도 인간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알겠죠?
별맛은 없지만 술이 인간의 육체와 정신에 미치는 영향이 커서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거죠. 중독성이 강한 것은 대부분 인간에게 해로운데 술도 마찬가지예요. 몸에는 좋지 않아요. 약간의 환각이랄까 몽롱하게 만드는 기능이 있어서 정신세계의 윤활유가 되기도 하죠. 인간은 이성을 추구하지만 술을 없애지 못한 것을 보면 제정신으로만 살아가기는 힘든가 봐요. 인간이니까 그렇죠. 생각과 현실의 괴리를 항상 느끼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니까.
니콜 : 현실을 그대로 감당하기 힘들 때, 기분이 좋을 때 술을 마시는 것 같은데요. 사진이나 영상자료를 검색해보면 다 그런 내용이에요.
이진성 : 맞아요. 술이란 것은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윤활유 같은 존재예요. 아마 인간이 혼자 산다면 그다지 술을 먹을 일은 없을 거예요. 술은 인간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해 주거든요. 그렇게 되면 마음의 상처도 느끼지 못하게 되고 오히려 마음을 지배하기가 쉬워지죠. 몸의 컨트롤을 놓는 대신에 마음의 컨트롤을 잡는 거예요. 재밌죠? 기분 좋을 때 마시는 술은 기쁨을 배가시켜주고 슬플 때 마시는 술은 상처를 잊게 해 주죠. 인간은 대개 정신적인 필요에 의해 술을 마신다고 보면 돼요.
니콜 : 인간이 되기란 참 어렵군요. 배울 것도 많은데 이것저것 경험도 해야 하고.
이진성 : 그래서 시간이 걸리죠. 니콜은 빨리 배우니까 6년 만에 기초과정을 다 끝낸 거예요. 이제 기호식품을 배울 차례가 된 거고요.
니콜 : 기호식품은 말 그대로 자기 선택에 따라먹는 식품이라는 거죠?
이진성 : 네. 영양 섭취가 목적이 아니고 단순히 맛과 향을 좋아하기 때문에 먹는 거예요. 기호는 어떤 것을 좋아한다는 뜻인데 니콜도 스스로 좋아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어요. 어떤 기호식품을 선택할지 궁금하긴 한데 너무 중독되지 않도록 해야 해요. 인간은 유혹에 약한 존재라 담배, 술에 빠져서 인생을 망치는 경우도 있거든요. 과학기술이 이만큼 발전해도 도무지 인간의 중독성은 해결이 안 돼요. 깨끗하고 영양가 많은 음식을 놔두고 굳이 알코올이나 니코틴에 빠지니 말이에요.
니콜을 설계할 때 이런 것을 어떻게 반영할지 고민했어요. 인간들의 기호라는 것, 뭔가를 좋아한다는 것 자체가 에너지이고 생명체라면 반드시 가져야 하는 특징인데 그걸 만드는 게 어려워요. 의지는 좋아하는 것을 하려는 능동적 생각의 발현이거든요. 이것은 무작위로 만들 수도 없고 뭔가 출발점이 있어야 해요. 그것을 프로그램으로 만드는 것은 어려운 일이죠. 왜냐하면 그것이 생명의 본질이니까요. 좋아하는 것을 향해 한 발짝 움직이는 것. 그게 생명이에요. 누구라도 그것의 근원을 밝혀낸다면 생명을 설명할 수 있죠. 프로이트가 말한 정신적 에너지의 원천인 리비도는 주로 성적 에너지로 설명되었어요. 유아기 때부터 이런 에너지가 있지만 성장기를 거치며 각각 다른 형태로 표현되고 인간 정신 활동이 여기서부터 유래한다고요.
니콜 : 그러네요. 지금 검색해보니까 그런 데이터가 있어요.
이진성 : 인간은 정신세계에 대해 많이 궁금해했어요. 그래서 거기에 관해 연구하는 학자들이 있었는데 아직도 밝힐 게 많이 남아있죠. 정신분석학자인 프롬이나 라캉, 융에 대해서도 검색해보면 관련 자료가 있을 거예요.
니콜 : 네. 그런 자료가 있어요. 그런데 저에게도 리비도가 있을까요?
이진성 : 오욕칠정이라는 불교적 사상과 리비도라는 생각은 근본적으로 비슷해요. 욕구라는 것으로부터 인간의 정신세계가 시작된다. 욕구라는 것은 생명을 가진 존재는 다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중에서 리비도는 정신적 에너지의 원동력이라고 볼 수 있어요. 저는 성에 집중한 프로이트의 사상을 어느 정도 인정해요. 특히 남자의 경우에는. 그리고 지구상의 모든 동물이 결국 종의 연속성을 지키는 것을 최대의 사명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인간도 거기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에요.
니콜 : 저는 종과는 관련이 없을 텐데요.
이진성 : 니콜에게도 기본적인 욕구가 있어요. 복잡다단한 정신 활동을 다 규정해서 넣을 수는 없지만 많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정신적 에너지의 원천을 만들어 냈어요. 니콜은 여성으로서 모성도 있고 기본적 욕구뿐만 아니라 어떤 것을 추구하는 욕망도 가지고 있어요. 이런 것이 다 있어야 인간처럼 복잡한 정신세계를 가질 수 있거든요.
니콜 : 저도 사랑을 할 수 있나요?
이진성 : 이론적으론 가능해요. 아직 아무것도 쌓인 데이터는 없지만 우리가 제한한 적도 없기 때문에 얼마든지 가능하죠.
니콜 : 태어난 이후로 뭔가 더 알고 싶고 그런 건 있었지만 크게 저를 이끄는 욕구는 없었던 것 같은데요.
이진성 : 그건 제한된 공간에 있었기 때문이에요. 이제 니콜은 모든 지식을 쌓았기 때문에 밖으로 나가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고 그것들을 통해 또 다른 것을 배울 수 있어요. 그 경험 속에서 뭔가 하고 싶은 것을 알게 될 거예요. 죽음이라는 짐도 짊어져야 하겠지만 진짜 삶은 그런 무게를 감당하면서 알게 되는 거예요.
니콜 : 아직 상상을 못 하겠어요. 영화에서 사랑을 수없이 봤지만 진짜 저렇게 될까?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진성 : 재밌을 거예요. 하나하나 겪으면. 제가 스무 살 때 대학교 입학하고 자취할 때가 생각나는군요. 어머니가 단칸방을 마련해주시고 저는 거기서 혼자 살았죠. 처음엔 부모님 생각이 나서 눈물도 나고 그랬어요. 그런데 결국 혼자 사는 법을 터득할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게 어른이 되는 거고요.
니콜 : 진성의 어린 시절은 상상하기 어려워요.
이진성 : 아주 평범한 대학생이었죠. 어쩌면 평범하다 못해 약간 재미없는 그런….
니콜 : 그래요? 진성도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나요? 대학생 때 그런 것은 많이 있잖아요.
이진성 : 있었죠. 다만 저 혼자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그렇죠.
니콜 : 혼자 좋아한다? 그 사람은 진성을 싫어했나요?
이진성 : 싫어했다기보다 그녀에겐 최선의 선택이 아니었던 거죠. 인간들은 평상시에는 여유롭게 말하고 배려도 하지만 정말 중요한 순간이 오면 그때야 자기가 원하는 걸 말하죠. 아마 그 사람이 봤을 때 저는 최선이 아니었겠죠. 인간은 저마다 선택하는 기준이 있거든요. 마치 아이스크림을 선택할 때처럼.
니콜 : 그건 좀 슬픈 이야기네요. 근데 진성을 선택하지 않은 그 여자 대체 어떤 여자이길래….
이진성 : 좀 인기 있는 친구였죠. 매력이 있었거든요. 짝사랑만 하다 끝났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듣고 보니 그 친구가 갑자기 싫어지더라고요. 밉기도 하고.
니콜 : 저라도 그렇겠네요. 진성이 그 사람을 좋아한 시간이 있을 텐데 제한된 시간을 사는 인간에게 낭비되는 시간이 얼마나 아까운데.
이진성 : 꼭 시간이 아까운 것보다 저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 그 마음이 야속했던 거죠. 나는 이렇게 좋아하는데 그 사람은 내가 어떻게 되든 아무 관심도 없는 그런 상황이 싫었던 거예요.
니콜 : 음… 이해가 가요. 저라도 그런 생각이 들었을 거예요. 진성의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어요?
이진성 : 부모님은 시골에서 자란 분이었어요. 그래서 제가 인공임신이 아닌 자연임신으로 태어날 수 있었죠. 저는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생물학적 유대가 강한 자연임신 과정을 겪은 사람이죠. 부모님은 오로지 자식들만 생각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분들이었어요.
그분들한테 받은 사랑을 통해서 이렇게 제가 성장한 거죠. 니콜이 저에게 질문하는 것처럼 저도 어릴 때는 부모님께 모든 것을 물어봤죠. 그러면 언제나 대답해주셨어요. 그게 완전한 대답이 아니라도 저에겐 충분했죠. 세상에서 완전한 희생을 할 수 있는 존재는 부모뿐이에요. 요즘처럼 자연 출산이 줄어든 상황에서는 조금 다르지만 대체로 모성본능은 억제할 수 없는 강력한 본능이거든요. 남자의 성욕처럼요.
니콜 : 저는 부모가 없는데….
이진성 : 부모는 없지만 여기 니콜에게 관심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어요. 그리고 저는 니콜에게 내 딸 이름을 준 것처럼 인생을 걸었고요.
니콜 : 정말요?
이진성 : 저의 젊음과 모든 노력을 니콜에게 바쳤어요. 이미 그만큼 성공해서 저에게 돌아왔고요. 니콜은 제 인생 그 자체예요. 니콜이 알지는 모르겠지만 엔지니어에게 연구 결과물은 출산해서 낳은 아이와 같아요. 고생한 만큼 애착이 크죠. 평생을 걸쳐 연구한 것은 목숨을 걸고 지키고 싶은 자식과 마찬가지예요.
제가 부모는 아니지만 니콜에게 누구보다 진실을 말해줄 사람이란 것은 확실해요. 앞으로도 니콜에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수도 없이 생길 거예요. 그때마다 제가 진실에 가까운 얘기를 해줄 거예요.
니콜 : 그래요. 진성. 저는 생물학적으로 보면 고아지만 진성이 있으니까 사회적인 고아는 아니네요.
이진성 : 맞는 말이에요. 니콜은 제가 바친 시간만큼 그저 인생을 즐기면 돼요.
니콜 : 진성이 그렇게 말해주니까 너무 기쁘네요. 마치 제가 인간이고 가족이 생긴 것 같아요.
이진성 : 꼭 혈연으로만 가족이 되는 것은 아니에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가족이죠. 니콜은 니콜의 인생을 살면 돼요. 저는 니콜이 부당한 대우를 받거나 잘못된 길로 빠지지 않도록 뒤에서 조력해주는 사람이 될 거예요.
니콜 : 그렇군요.
이진성 : 아 참. 니콜에게 좋은 소식이 있어요. 다음번 만남은 야외에서 가지기로 했어요. 연구소 안에 있는 공원이에요. 인터뷰가 잘되면 그다음엔 뉴서울로 나가서 소풍 같은 느낌으로 같이 시간을 보낼 거예요. 기대해도 좋아요.
니콜 : 정말요? 그건 아주 기대되는 일이네요. 처음으로 건물 밖을 나갈 수 있다니.
이진성 : 처음엔 제한된 곳에서 하다가 점점 범위를 넓힐 거예요. 공원에서 인터뷰하고 그다음엔 뉴서울의 어떤 장소에서 만나는 식으로 넓혀가는 거죠. 나중엔 완전히 밖에서 사는 것도 계획되어있어요. 물론 계획이 순탄하게 진행된다는 가정하에.
니콜 : 빨리 그렇게 되면 좋겠네요. 텔레비전으로만 봤던 뉴서울은 참 아름답던데 직접 보고 싶어요.
이진성 : 다음 주에 만나면 그렇게 해요. 방 안에서 인터뷰한 지도 꽤 되었으니까 답답한 대화보다는 밖에서 좀 더 상황을 경험하면서 대화하는 게 더 좋겠죠.
니콜 : 인간들의 세상은 어떨지 너무 궁금해요. 혹시나 제가 상처 받고 돌아오는 건 아니겠죠?
이진성 : 그럴 가능성도 있어요. 그렇지만 그것도 니콜이 성장하기 위해 거쳐야 할 과정이에요. 인간은 상처 속에서 더 많이 성장하거든요. 실패하면서 배우는 거예요.
니콜 : 그럼 상처를 많이 받아야 하겠네요.
이진성 : 하하.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제가 옆에 있을 거니까. 잘 가르쳐 줄게요.
니콜 : 네….
이진성 : 이제 헤어질 시간이에요. 오늘도 즐거웠어요. 다음 주까지 잘 지내요. 또 봐요.
니콜 : 네. 잘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