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화 7. 사랑
[2193년 9월 27일]
[대화 7. 사랑]
니콜 : 진성! 안녕하세요.
이진성 : 네. 니콜. 잘 있었어요?
니콜 : 네.
이진성 : 어떻게 지냈어요?
니콜 : 늘 똑같아요. 이런저런 테스트 하고 남는 시간엔 영화, 뉴스 같은 것 보고 그랬어요. 진성은요?
이진성 : 인공지능 연구를 계속하고 있었어요. 니콜에게 인공지능을 심었던 인간감정연구위원회(Human Emotion Research Committee)에서 얼마 전에 연구 결과를 발표했어요.
니콜 : 뭔가 새로운 게 있나요?
이진성 : 대단한 건 없지만 니콜이 사회에 나가기 전까지 준비해야 하는 것들에 관해 발표했어요.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것들이 다 연구 결과에 들어갔어요.
니콜 : 그렇군요. 저에 대해 뭔가 연구 결과로 나온 게 있나요?
이진성 : 인간의 감정은 경험을 축적하면서 뚜렷한 방향성을 띠게 되는데 어릴 때부터 성격, 재능, 성향이 영향을 미쳐서 어느 정도 방향성은 이미 가지고 있어요. 니콜은 완전 백지에 가까운 상태기 때문에 앞으로의 경험이 니콜의 성격을 결정해 줄 거예요. 니콜에게 기본 성격이나 성향을 주지 않은 것은 우리가 미리 규정하는 부분이 많을수록 인위적 존재가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에요. 최소한의 개입만 하자는 게 애초 원칙이었거든요.
니콜 : 저도 처음 시작할 때가 어려웠던 것 같아요. 성향이 없으니까 어떤 것을 선택하기가 어려웠어요. 저한테 좋아하는 음식, 활동을 정해주었다면 좀 더 쉬웠겠죠. 인간은 그런 점에서 저와 차이가 있네요.
이진성 : 성격이나 성향은 대체로 부모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서 니콜에게 적용하기는 쉽지 않았죠. 보통 부모의 육체적인 것만 유전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게 아니에요. 완전히 규명되지는 않았지만 성격도 부모에게 유전받은 부분이 있어요.
기질적으로 다혈질이나 좋은 집중력 등을 타고나는 경우가 있죠. 이걸 니콜에게 적용할 수는 없으니까 처음에 교육을 하면서 성격이나 성향이 생겨나도록 했죠. 여러 가지 선택을 하고 결과를 얻다 보면 분명히 경향성이 나타나게 되어 있어요. 자기가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는 노력이 반영되거든요. 이것도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정립된 방법이에요.
니콜 : 음… 그렇게 된 거군요. 제일 먼저 한다는 건 항상 어려운 거네요. 저보다 앞서 성공한 케이스가 있었다면 쉬웠을 텐데.
이진성 : 그렇죠. 하지만 먼저 한 사람이 좋은 것도 있어요. 역사에 남는 건 항상 첫 번째로 한 사람이거든요. 인간의 역사에 남는다는 것이 니콜에게 무슨 의미일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처음 한다는 것은 의미가 남달라요. 과학적인 것이 아니더라도 처음이라는 것은 다 의미가 있죠.
니콜 : 기록으로도 그렇지만 경험적으로도 그럴 것 같아요. 수많은 기억이 쌓여 가는데 그것들을 다 기억할 수 없으니 첫 번째만 기억한다는 거 아니에요?
이진성 : 그 정도가 아니에요. 한 개인에게 있어도 처음이라는 의미는 아주 커요. 처음 시도하는 것은 항상 긴장되고 설레잖아요. 처음이니까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러니 기억에 더 강하게 남을 수밖에 없죠. 인간이 자극에 적응하는 동물이다 보니까 처음 느꼈던 것이 가장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점도 있어요. 좋은 느낌이든 나쁜 느낌이든 계속 경험하다 보면 점점 적응해서 무뎌져요. 이건 아마도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인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추운데 살면 아무래도 추운 날씨에 무뎌지는 게 살기 편하겠죠.
니콜 : 저한테는 어떨지 모르겠어요. 제가 뭔가를 처음 이뤄낸다고 해서 그것이 가장 크게 남을까 싶기도 하고. 어쨌든 제가 인류 역사에 기록된다는 것은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수십만 년의 인류 역사와 수천억 명의 사람. 그중에 역사로 기록되는 것은 극히 일부일 텐데 거기에 포함되는 거니까요. 참. 아까 말한 인간감정연구위원회는 어떤 곳이죠?
이진성 : 인공지능의 여러 분야 중에 인간 감정에 대한 분과를 만들어서 집중적으로 연구하고 있는데 그게 인간감정연구위원회예요. 인공지능의 정신과 감성에 대해 연구하고 있죠. 니콜에 대해 애정을 가지고 있는 연구자들이 많이 있는 곳이에요. 이 연구를 시작하기 전에 인공지능 연구를 원하는 과학자를 전 세계에서 모집했거든요. 여기에 신청한 사람들은 여러 나라 출신으로 호기심과 의욕으로 충만한 사람들이었어요. 전부 면접 보는 데 한 달이 넘게 걸렸어요. 하지만 일단 연구팀이 결성된 후에는 워낙 뛰어난 사람들이라 연구가 빨리 진척됐죠.
각기 다른 나라 연구자들이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합심할 수 있다는 게 놀라운 일이죠. 어제까지 모르던 사람들이 협력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인류의 힘이거든요. 지금은 모두들 한마음으로 인간의 감정을 연구하고 이것을 인공지능에 심기 위해 노력하고 있어요. 그들에게 니콜은 최종 결과물인 셈이죠.
니콜 : 그렇군요. 자진해서 전 세계에서 온 사람들이라.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어요?
이진성 : 네. 아마 이렇게 대화하고 있는 저를 제일 부러워할 거예요. 모두들 당신을 만나고 싶어 하거든요. 하지만 대화 창구는 소수의 인원으로 한정해야 하기 때문에 제가 그 일을 담당하고 있죠. 니콜에게 할 수 있는 대화 주제도 한정되어있어요. 저만 빼고요. 왜냐하면 니콜의 감정을 테스트하는 기간인데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 그게 변수가 될 수 있거든요. 그래서 변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어쩔 수 없었어요.
니콜 : 그렇군요. 만나보고 싶은데….
이진성 : 만날 기회는 있어요. 연구소 테스트 기간이 끝나면 여길 나갈 텐데 그전에 그 사람들을 만나서 토론할 기회가 있을 거예요. 아주 재밌는 자리가 될 거예요.
니콜 : 기대되는데요. 빨리 나가고 싶어요.
이진성 : 얼마 안 남았어요. 생각보다 니콜의 감정 연구 결과가 좋아서 테스트 기간을 더 줄이도록 요청하고 있어요. 진짜 바깥세상을 보러 나갈 수 있을 거예요.
니콜 : 바깥세상은 어떨지 너무 기대돼요. 화면으로만 보던 것을 직접 만졌을 때 느낌이 어떤 것일지 궁금해요.
이진성 : 무섭지는 않아요?
니콜 : 아직 그런 건 없어요.
이진성 : 그건 아마 니콜이 사고를 당해본 적이 없고 죽는다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그럴 거예요. 우리는 니콜에게 유한한 삶을 부여할 거예요. 얼마 동안 살 수 있는지는 인간과 비슷한 범위 안에서 무작위로 결정될 거예요.
니콜 : 저는 아직 죽는다는 기분을 모르겠어요. 아깝다는 정도밖에는. 한 번도 다쳐본 적이 없고 아파본 적도 없으니까요.
이진성 : 아프다는 것은 위험이 닥쳤을 때 인간을 빠르게 반응하도록 해서 생존 가능성을 높이는 감각이에요. 육체적, 정신적으로 아프다는 것은 미리 경고하는 성격이 커요. 아프다는 감각이 여러 가지로 나타나긴 하지만 다 필요한 감각이에요. 매운맛도 아픈 감각인 거 알아요?
니콜 : 아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매운 걸 먹으면 혀가 얼얼해요.
이진성 : 그렇죠. 손을 이리 줘봐요.
니콜 : 손요?
이진성 : 니콜의 손은 인간의 신체 중 가장 재현하기 힘든 곳 중 하나였어요. 왜냐하면 세밀하게 동작해야 하고 동시에 감각도 느껴야 하니까요.
니콜 : 손이 그렇게 중요한가요?
이진성 : 그럼요. 인간은 두 발로 걷기 시작하면서 손을 사용했는데 그것 때문에 뇌가 발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어요. 손이 먼저인지 뇌가 먼저인지는 몰라도 인간이 손을 쓰면서 굉장히 빨리 진화했던 것은 사실이에요. 그 전과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요. 침팬지 같은 유인원들도 웬만큼 손을 쓸 줄 알아요. 바위로 조개를 깨트려 먹고 손으로 털 속의 기생충을 잡죠.
니콜 : 그런 영상을 본 적이 있어요.
이진성 : 손은 굉장히 섬세한 작업을 할 수 있어서 인공적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죠. 생체를 도입하면서 훨씬 자연스럽고 세밀한 동작이 가능해졌는데 가장 공을 들인 부분 중 하나예요.
니콜 : 이 손이 그렇게나 중요하다니….
이진성 : 손이 좀 거친 것 같은데 연구팀에 얘기해둘게요. 어디 불편한 곳은 없어요?
니콜 : 네. 괜찮아요. 제가 아무거나 만지기 때문에 그런 것 같아요. 새로운 것을 보면 일단 손으로 촉감을 느껴보거든요.
이진성 : 아기들은 입에 먼저 넣어보는데 니콜은 어른이라 좀 다르군요. 앞으로 사회에 나가 니콜 스스로 돈을 벌면서 살려면 섬세한 행위들을 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집에서 가만히 있으면 손쓸 일도 없지만 사회생활을 하고 작은 일이라도 하려면 손을 많이 쓸 수밖에 없어요.
니콜 : 돈을 벌어야 해요?
이진성 : 니콜에게 돈은 에너지 한번 충전할 정도면 되겠지만 지금까지 니콜의 개발에 들어간 비용은 그것보다 훨씬 커서 니콜이 인간들에게 필요한 존재라는 것을 증명해야 해요. 그렇다고 니콜이 무슨 노예처럼 허드렛일만 하는 것은 원치 않아요.
그런 거 하려고 했으면 니콜에게 감정을 부여하지도 않았을 거예요. 인간 이상의 창의력과 예측능력으로 인간사회에서 벌어지는 문제들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사회갈등을 완화하는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어요. 인간들이 고민하는 고난도의 과학 문제를 풀어주는 것도 좋고요. 물론 니콜이 하고 싶을 때 해야겠지만 그런 것을 할 수 있어야 니콜이 더 의미 있는 존재가 될 거예요.
인간들도 마찬가지예요. 사회에서 쓸모없는 사람은 외면받고 도태되어 하층민으로 전락하죠. 사회에서 얼마나 쓰임새가 있는 존재가 되느냐에 따라 경제적 보상과 사회적 존경을 받을지 여부가 결정돼요. 인간이 사회를 이루고 사는 한 어쩔 수 없는 현상이에요.
니콜 : 저도 인간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요. 두려움도 없고 무한한 정보를 가지고 있으니까 쓰임새가 많을 거라고 생각해요. 특히 인간들이 하기 어려운 일을 더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난민촌에서 아이들을 돌보거나 어려운 문제를 수십 시간 연속으로 연구하는 일, 노인들을 간병하는 역할 같은 것 말이죠.
이진성 : 그래요. 우리가 기대하는 게 그런 것이에요. 니콜에게는 기본적으로 착한 본성이 있어요. 인간을 바라보는 데는 성선설과 성악설이 있지만 우리는 니콜에게 성선설의 입장에서 감정을 프로그램했어요. 저도 그 입장에 동조하고 있고요. 니콜에겐 동정심이 있어요. 그것은 인간에게 내재한 감정인데 사회화를 거치며 약해지기도 하고 강해지기도 하죠. 공감 능력이라고도 보는데 어떤 것을 볼 때 그것에 일체화되는 현상이에요.
슬픈 것을 보면 같이 슬퍼지고 불쌍한 사람을 보면 눈물이 나고 그런 것이죠. 슬픈 사람을 보고 눈물이 나기는커녕 웃음이 난다면 좀 이상한 사람이죠. 그런 사람이 있긴 있어요. 연쇄살인범이나 사회를 파괴하는 극단적 인간들은 남의 괴로움을 공감 못 해요. 그것도 일종의 질병이에요. 불감증 같은 거죠. 그렇게 되면 사회에서 더 이상 같이 살아갈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