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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르히아이스 Apr 30. 2023

주 52시간, 69시간 둘 다 틀렸다 -2-

2. 경직된 조직구조

조직구조 역시 노동법이 정상적으로 적용되는 걸 막는데 지금 69시간제에서 말하는 바쁠 때 몰아서 일하고 쉴 때 쉬는 게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 조직구조 때문이다. 한 달 내내 야근하고 한 달을 쉬려면 나 대신 일할 사람이 필요하다. 일주일정도야 동료가 어떻게 하겠지만 한 달을 대신하려면 그 업무를 완전히 파악하고 있어야 되고 다른 업무를 해서도 안된다. 즉 이걸 하려면 인력이 더블 매트릭스로 갖춰져 있어야 한다. 똑같은 업무에 최소 2명이 배치되어야 한다는 얘기다. 내가 많은 회사를 다녀봤지만 다른 일을 하지 않고 똑같은 업무에 2명의 직원을 배치한 경우는 없었다.


 보통 한 사람당 하나의 사업이나 서비스를 맡아서 한다. 자기 업무를 하면서 다른 업무를 부로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휴가 가면 부가 정으로 일한다. 이 조직구조를 그대로 두고 69시간제를 추진하는 건 애초에 불가능하다. 이 아이디어를 낸 사람은 분명 회사를 다닌 적이 없거나 교수등 비교적 자유로운 업종에 있었던 사람이 틀림없다.


 그럼 이 구조가 바뀔 수 있는가? 이것도 거의 어렵다. 현재 인력의 2배를 고용해야 하니 누가 하겠는가? 전 직원이 동시에 쉰다면 가능하다. 대기업이 여름휴가를 이런 식으로 하긴 하지만 한 달씩 회사를 문 닫아도 되는 곳이 몇 곳이나 될까?


 3. 경영진의 낡은 사고

 우리나라 경영진은 아직도 낡은 사고에 젖어있다. 임원급으로 올라간 사람들은 거의 가정을 버리다시피 한다. 1/1000 확률을 뚫고 그 자리까지 간 사람이니 당연할 수도 있다. 본인이 그렇게 올라왔는데 아랫사람에게 워라밸을 권장할 수 있겠는가? 아마 워라밸 개념조차 모를 것이다. 우리나라는 효율이나 합리성보다는 정신력, 열정, 패기를 강요한다. 전형적인 80년대 불도저 마인드이다. 나이가 젊은 임원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불도저들만 상위직급에 올라간다.

 나는 똑같은 일을 하면서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한 적이 있다. A라는 사람이 프로젝트 리더였는데 이 사람은 하루에도 10통 이상 생각날 때마다 팀원들에게 메일을 보내 문제점을 검토하게 만든다. 그리고 문제가 생기면 빨리 고치라고 윽박지르고 계속 불러 닦달한다. 이렇게 되면 팀원들은 충분한 검토 없이 닥친 문제만 고치기 바쁘고 수없이 날아오는 메일을 검토하느라 업무시간을 빼앗긴다. 결국 심사숙고해 한번에 고쳐져야 할 문제가 단편적으로 해결되어 다른 문제를 낳고 이러다 보니 시간이 모자라 매일밤 야근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러다 A가 해외 출장을 갔고 B라는 사람이 임시 리더를 맡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B는 본인이 검토해 진짜 문제가 될 사안만 팀원들에게 공지했고 메일수는 1/10로 줄었다. 문제가 생기면 같이 고민하고 토론했다. 자꾸 부르지 않으니 담당자는 심도 있게 문제를 검토할 수 있었고 한 번에 해결되었다. 시간은 오히려 남아돌았다. 팀원들은 같은 일을 하면서도 칼퇴근을 할 수 있었다.


 이건 내 실제 경험이다. 아이러니 한건 리더 A와 B가 동기였는데 A가 먼저 승진되었다는 사실이다. 이게 현실이다. 우리나라는 스마트한 인재보다 불도저가 인정받는다.


위의 3가지가 근무시간제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범인이다. 그럼 근무시간제가 제대로 현장에 적용되려면 무엇이 선결되어야 할까? 나는 2가지를 들고 싶다.


근무시간제가 현장에 적용되기 위한 조건 

1. 법정 근무시간을 명확히 지킬 수단 확보

여기엔 여러 가지가 포함되는데 일단 근무시간을 측정해야 하고 여기에 어떤 부정도 개입되어선 안된다. ID카드를 대신 찍어주는 등의 일은 이미 흔하게 벌어지고 있다. 근무를 하면서도 기록을 안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예전에 내가 본 사람 중에는 일요일에 나와서 일하고 월요일에 휴가를 내는 사람도 봤다. 이런 미친 짓을 왜 하냐면 오로지 회사에 잘 보이기 위해서다. 일요일에 나와 일하면서(물론 돈을 받지 않고) 휴일을 희생하니 위에 잘 보이게 되고 월요일에 휴가를 내면서 연차를 차감하니 또 한 번 점수를 딴다. 때로는 이 연차마저 쉬지 않고 회사에 나온다.


 이런 일이 없으려면 우선 철저한 근무시간 기록이 되어야 한다. 나는 어떤 제도든 법정근무시간만 지켜지면 큰 문제가 없을 거라고 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그게 어렵다. 그것부터 해결하고 나서 법개정을 말해야 한다.

2. 초과근무 시 무거운 부담 및 공짜 근무 방지책 확보 

근무시간을 쉽게 줄이는 방법은 법으로 몇 시간 하라는 것보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게 만드는 것이다. 우선 초과근무 시 정상근무보다 수당을 훨씬 늘려 회사에 부담을 주게 해야 한다. 물론 지금도 야근, 특근에 대해 추가적인 비율로 수당을 주고 있지만 부족하다. 압도적인 수당을 주도록 만들어 오히려 사원들이 근무하려 하고 회사에서 말리는 상황까지 가야 한다.


 그리고 근무시간을 어기는 것에 대한 철저한 처벌도 필요하다. 이것은 재해 수준으로 해서 대표이사 해임까지 하도록 해야 한다. 노동부 암행감찰, 파파라치, 경찰 즉시 출동등을 통해 언제든지 고발할 수 있는 수단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이 정도가 아니면 절대 없어지지 않는다. 음지에서 약자를 상대로 암암리에 행해지는 야근을 이런 조치 없이 어떻게 막겠는가? 


 예전에 내가 80년대 유럽 영화를 본 적이 있는데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영화내용은 연극배우들이 공연을 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주인공이 사망하면서 벌어지는 일이었다. 공연은 코앞이고 주인공이 사망하자 시나리오가 급히 수정되었고 어쩔 수 없이 남은 며칠 동안 새로 연습을 해야 했다. 작은 극단이라 연극에 참여한 배우들은 무명이고 캐스팅된 것만 해도 감사히 여겨야 하는 입장이었는데 그럼에도 그들이 가장 먼저 주최 측에 요구한 것은 다름 아닌 초과근무 수당이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연극의 성공을 위해 너나 할 것 없이 단결을 외치면서 열정으로 때우고 무명배우들이 단장에게 수당얘기를 꺼내지도 못할 것이다. 애초에 연극에 초과근무라는 개념이 있기는 한가? 80년대에 벌써 이런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게 놀랍고 아직도 69시간이냐 52시간이냐로 논쟁하는 한국의 현실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바쁠 때는 바짝 일할 수도 있는 것 아니냐고 하는데 그것도 잘 생각해봐야 한다. 과연 정말 바쁠 만한 것인지 아니면 구조적 문제 때문인지 말이다. 게임업계에서 크런치모드라고 해서 출시 전에 날 새면서 개발하는 문화가 있는데 이건 잘못된 것이다. 애초에 개발을 체계적으로 했으면 일이 이렇게 몰릴 일이 없다. 우리나라 소프트웨어업계가 하나같이 폐인들만 양성하는 이유는 소프트웨어 공학에 입각한 체계적 개발대신 빨리빨리 인력만 갈아 넣어서 작동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프로그램을 만들기 때문이다.


 고속도로는 이렇게 만들 수 있어도 소프트웨어는 안된다. 왜 소프트웨어 산업에서 서구권 회사들만 눈에 띄는 성과를 내고 있을까? 바로 수평적 조직구조를 기반으로 한 철저한 설계를 거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만들면서 설계하는 말도 안 되는 구조로 여기까지 왔다. 


 이런 현실들을 외면하고 바쁠 때는 밤새고 일하라는 건 말이 안 된다. 인간은 기계처럼 몰아서 일하고 몰아서 쉴 수가 없다. 우리에겐 게임주인공처럼 스위치로 켰다 껐다 할 수 있는 모드가 없다. 한 달 바짝 일하면 두 달 쉬어야 될 수도 있고 영원히 쉬어야 될 수도 있다. 지금 해야 할 건 법으로 몇 시간을 하느냐가 아니라 있는 법이라도 제대로 지키게 만들고 근무여건을 더 나은 미래로 가도록 합리성에 기반한 정책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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