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I정보센터에 올라온 어이없는 ESG 우수 사례를 인용해 보겠다. 미국의 파타고니아는 1년 중 가장 많은 판매고를 올리는 블랙프라이데이 때 “이 재킷을 사지 말라”는 캠페인을 벌였다. 이유는 탄소와 각종 자원 사용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한다. 어느 정도 이성이 마비되면 이걸 우수사례라고 소개하는 걸까? 이건 우수사례도 아니고 오만이자 만용이다.
소위 먹고살만하니 적당히 하겠다는 소리밖에 안 된다. 잘 생각해 보자. 이건 마치 골프선수가 그랜드슬램을 앞두고 다른 선수에게도 기회를 줘야 하니 출전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나 같다. 삼성전자가 고성능의 휴대폰이 환경을 파괴하니 저성능 비중을 늘리겠다는 것이나 같다. 이게 말이나 되는가?
게다가 얼마나 오만한가 하면 사실상 소비자를 환경파괴범으로 몰고 있다. 소비자는 자사 제품을 선택한 고마운 고객이 아니고 환경파괴범이니 수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엔 마치 자기들만 생각이 있고 의식이 있다는 급진적인 PC나 환경론자들의 태도가 깔려있다. “너희는 모르니까 그렇게 행동하는 거야. 우리처럼 진정한 생각이 있다면 이렇게 행동해야 하는 거야.” 이렇게 소비자를 가르치고 있다.
제품을 살지 말지는 소비자가 결정하는 것이다. 제품 사는데 뭘 고려할지도 소비자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걸 제조사가 가르치듯이 억지로 통제하겠다는 건 도대체 어느 정도의 오만이 있어야 나올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엄밀하게 말해서 이것은 배임행위나 다름없다. 이 기업이 운영될 수 있게 투자한 많은 투자자들의 노력을 외면하고 일부러 매출을 낮게 만들고 있다. 누굴 위해서? 앞에서 분명 ESG는 소비자들의 충성도를 유도해 매출을 늘리고 더 많은 투자를 받도록 만드는 것 아니었나? 그런데 투자자를 배신하는 이 행위가 우수사례라고?
KDI에는 또 재밌는 사례가 올라와 있다. 넷플릭스는 포용을 기업의 문화적 가치에 포함시키고 이를 위해 직원의 성별과 인종비율을 공개하고 히스패닉, 라틴계 채용을 늘리겠다고 했다. 거기다 콘텐츠 등장인물과 제작진의 구성을 젠더, 성소수자, 장애인등의 기준으로 다양성 보고서를 내겠다고 했다.
이것도 정말 이성이 마비된 행태라고 보이는데 성별과 인종에 대한 명시적인 차별이 없다는 전제 아래 인종의 비율이 무슨 관계인가? 공기업도 아니고 사기업 일자리인데 왜 그런 걸 고려해야 하나? 내가 충분히 합격할 자격이 되는데 단지 인종비율 때문에 소수자가 아니어서 불합격되어야 한단 말인가? 인종이 다양하면 더 포용적이란 건 누가 만든 기준인가? 어떤 인종인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인드가 중요한 것이다.
지난 LA흑인 폭동당시 한인가게가 직격탄을 입었다는 걸 기억하는가? 미국사회에서 흑인은 아시아계보다 기득권을 누리고 있으면서 아시아나 소수인종의 차별에는 얼마나 관심을 가졌나? 오히려 차별하지는 않았나? 무슨 인종인지가 왜 입사하는데 기준이 되어야 하나? 여기가 유엔인가?
제작진과 등장인물에서 젠더, 성소수자를 다양성 기준으로 하겠다는 것도 말도 안 된다. 콘텐츠는 재미와 작품성이 우선이다. 도덕적인걸 하려면 다큐를 만들면 된다. 아니면 대중예술이 아닌 순수예술을 해도 된다. 그런데 대중예술에서 젠더와 성소수자를 다양성 기준으로 넣겠다고? 이건 디즈니가 망한 방식으로 이미 역효과가 입증되었다.
제작진에 꼭 동성애자가 있어야 되나? 장애인이야 약자니까 보호차원에서 넣자고 치자. 동성애자가 약자인가? 소수자일 순 있어도 약자라고 말할 순 없다. 그들은 장애인처럼 도와주지 않으면 살 수 없는 계층이 아니다. 동성애자라고 해서 걷지 못하는 것도 아니고 앞이 안 보이는 것도 아니다. 이걸 장애인과 동급취급한다? 이런 억지 다양화로 좋은 콘텐츠가 만들어질 수 있겠는가? 정말 재능 있는 사람이 동성애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떨어지고 정말 연기 잘하는 사람은 남자라서 배역에서 떨어진다면 이게 맞나?
이것은 PC주의에서 보던 현상과 판박이처럼 닮아있다. 인권을 하도 보호하다 보니 범죄자의 인권이 오히려 피해자보다 더 지켜진다. 지금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전쟁에서 국제 사법재판소는 오히려 이스라엘에게 학살방지 명령을 내렸다. 기가 막힌 일이다. 얼마 전 UN 팔레스타인 구호단체 직원들이 하마스의 무차별 민간인 납치에 협력한 것으로 드러나 문제가 되고 있는데 이것만 봐도 국제기구가 얼마나 PC에 오염되어 있어 약자라는 타이틀로 쉽게 뚫고 들어갈 수 있는지 알 수 있다.
ESG가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닌 것 같은데 갈수록 확장되어 점점 PC와 닮아가고 있다. 그래서 ESG가 PC의 확장판이라는 것이다. PC가 미국과 유럽에서 활발하게 유행하다 환경론자들과 결합해 사회운동이 아닌 실질적으로 사회를 통제하는 힘으로 나온 게 바로 ESG라고 생각이 들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환경이나 인권문제를 말하면 무조건 좋게 보는 경향이 있다. 좋은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들이 무조건 옳은 것은 아니다. 사회는 그렇게 이분법적이지도 않고 뜻이 좋다고 반드시 결과도 좋다는 법은 없다. 그런데도 이들은 이제 ESG라는 강제적인 수단까지 꺼내 사회전반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나도 처음에는 ESG를 유행에 따라 나오는 경영툴이나 혁신기법정도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점점 커지는 ESG바람의 내막을 자세히 살펴보니 이건 단순한 유행이 아니라 지속가능한 경영이라는 탈을 쓴 또 다른 PC주의와 환경주의에 다름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럼 기업이 도덕적이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이 질문도 반드시 해봐야 하는데 기본적으로 기업은 이윤을 추구하기 때문에 부도덕한 유혹에 빠지기 쉽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법을 준수하면서도 악덕기업이 될 수 있다. 그런 기업을 어떻게 해야 하나?
여기서 정의감에 빠져 징벌한다든가, 퇴출한다든가 이런 생각을 하면 ESG같은 도구를 꺼내게 되고 앞서 본 것처럼 웃기는 사례가 나오게 된다. 우리가 정의를 추구하는 건 당연하고 누구나 같은 마음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쨌거나 정상적인 기업의 벨류체인이나 라이프사이클 안에서 이뤄져야 할 일이다.
이걸 ESG같은 도구로 통제하다 보면 앞에서 본 것처럼 미친 사례가 나온다. 도구가 만능이 아니다. 그걸 우회하는 길도 있고 과신하면 기업을 평가하는 도구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버린다. 예측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법적인 제도를 완비하고 이탈한 기업에 대해서는 강력한 손해배상과 처벌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를 널리 알릴 수 있는 방법도 필요할 것이다. 요즘엔 미디어가 발달해 이미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다.
파리바게트가 계속되는 노동자 재해로 이미지가 안 좋아진 게 그 사례이다. 나부터도 가기가 꺼려진다. 도덕적 통제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마치 신이 된 것처럼 미리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도덕적 기업은 이상형이고 우리는 이상형과 비슷한 사람과 결혼하지 이상형과 결혼할 수 없다. 그게 인생의 이치임을 잊어선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