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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횡설술설 May 22. 2022

나의 안전지대

사이판 바다 한가운데에서

덜컥 사이판 비행기 표를 끊었다. 뭣도 몰랐기에 할 수 있었던 결정이었다. 내가 바다공포증이 있는 걸 아는 동생은 함께 비행기 표를 끊으면서도 진짜 괜찮겠느냐고 재차 확인했다. 몰라, 어떻게든 되겠지. 그저 바다에서 다이빙을 하면 어떤 느낌일지 궁금했던 게 다였다. 현실의 어떤 잡생각도 떠오르지 않고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는 완전한 자유로움을 느껴보고 싶었다. 바다에 대한 내 공포감이 상상 속이 아닌 현실로 어떻게 발현될지 궁금했던 것도 덤.


어느 순간부터 바다공포증이 생겼다. 그 시작은 아마 몇 년 전 서핑하러 갔을 때인 것 같다. 서핑하기 전 주의하라는 몇 종류의 해파리 얘길 들었는데, 보드에서 떨어지며 어두컴컴한 물속에서 제일 위험하다는 해파리를 눈앞에서 본 후로 갑자기 바다가 무서워졌다. 어릴 때부터 물이라면 마냥 좋아만 했는데, 처음으로 내가 생각지 못한 생물체들이 사는 어둡고 깊은 곳이라는 생각에 공포감이 생긴 것이다.


프리다이빙을 시작한 것도 그 이유였다. 내가 두려워하게 된 깊은 물속으로 오히려 더 들어가 이 공포감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처음엔 5m 수영장만 가도 무서웠다. 프리다이빙의 기본은 편안한 마음과 호흡인데, 끝도 없이 깊어 보이는 바닥에 한참 호흡이 불안정했다. 그래서 아주 천천히, 조금씩 깊은 물과 친해졌다. 편안하게 있어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되뇌면서. 프리다이빙은 멘탈 스포츠라는 말이 맞았다. 물속에서 안전하게 있기 위해서는 마음을 편안하게 컨트롤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5m도 잘 못 내려가던 잔챙이 시절


사이판에서는 보트 다이빙을 했다. 함께 다이빙을 하는 다이버들 10명 정도가 작은 보트를 타고 나간 후 특정 포인트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다이빙을 하는 거였다. 포인트가 다가올수록 심장이 빨리 뛰며 공포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바다공포증을 내가 너무 만만하게 봤나. 최대한 침착하게 마스크를 쓰고 핀을 챙겨 뛰어들 준비를 했다. 벌써부터 호흡이 가빠오기 시작했다.



하나둘씩 뛰어드는 사람들을 따라 나도 두 눈 질끈 감고 뛰어들었다. 처음 바다로 들어가 내 눈으로 바닷속을 처음 들여다본 순간. 그 순간의 감정은 말로 표현을 못하리만큼 낯설고 경이로우면서도 무서웠다. 바닥도, 앞뒤도, 양옆도 끝없이 푸르르게만 펼쳐지는 것에서 오는 신비로움과 공포감이 훅 밀려왔다.


너무 무서워서 호흡 조절이 잘 안 됐다. 호흡이 짧고 불안정했다. 이런 상태면 숨이 모자라 잠수도 못하는 상태였다. 배운 대로 멘탈 조절을 해야 했다. 괜찮아 여긴 나의 안전지대야, 라고 가쁜 호흡 속에서 계속해서 나에게 상기시켰다. 그때 떠오른 건 신기하게도 현실 속 나의 안전지대 역할을 해주는 사람들이었다. 내가 알게 모르게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 얼굴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호흡을 안정시켰다. 그리고 바닷속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스스로를 조금씩 안정시키며 호흡을 고르고 들어가 본 바다는 그만한 가치가 넘치도록 충분했다. 물은 숨막히게 파랬고 시야 확보도 좋아 저 깊은 바닥이 마치 가까이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행운이 따랐는지 그렇게 보기 힘들다던 바다거북, 이글레이, 정어리떼와 바라쿠다까지 만났다. 바다 생물들도 직접 코앞에서 보니 신비롭기도 두렵기도 했다. 내셔널 지오그래피에서만 보던 광경인데. 익숙하면서도 낯설었다. 내 두 눈으로 보고 있으면서도 내가 보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마치 음원을 라이브로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이랄까.


한참을 파도에 몸을 맡기고 함께 넘실댔다. 조금씩 숨통이 트이며 몸의 긴장이 풀어졌다. 바닷속 주파수와 나의 주파수를 맞추니 고요했다. 바닷속은 내 호흡소리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잠잠한 곳이면서도 많은 생물들이 움직이고 있던 분주한 곳이었다. 이런 기분이구나. 바닷속 깊은 곳에 대한 두려움은 여전했지만 바닷물과 함께 하는 나는 한결 편안하고 자유로워졌다.


현실 생각을 모두 끊어낸 완전한 공백의 상태를 위해 바다로 들어갔는데, 잡을 것이 아무것도 없던 망망대해에서 나를 잡아준 건 현실 속 내 사람들이었다. 가장 불안했을 시점에 더듬더듬 떠올라 준 그들은 내가 여기 있으니 괜찮다며 몸 안의 피를 다시 돌게 했다. 어디서든 나의 심적 안전지대는 필요하다는 것을 이렇게 다시 한번 새기게 된다. 충분하게 호흡하고 또 존재하기 위해서.


머무는 내내 물놀이 복장으로 아무거나 대충 걸치고 다니는 자유로움도 날 한껏 호흡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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