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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횡설술설 May 31. 2022

'굳이'를 '기꺼이' 받아들이기 위해

운동하기 싫은 스스로를 달래고자 하는 정성

잠깐 쉬면서 책을 폈다가 '무언가를 희망할 용기가 융기할 것이다' 라는 문장을 봤다. 왜 굳이 '융기한다'고 썼지. 잠시 생각해보다 책을 덮어버리고 말았다.


며칠 내내 야근하며 일에 치이고 나니 마음에 여유가 사라졌는지, 평소 같았으면 곱씹어보았을 표현들이 마냥 거추장스럽게만 느껴졌다. 한편으로는 괜스레 서글프기도 했다. 마음에 여유가 없는 사회는 이런 식으로 문학과 멀어지겠지. 단어 하나하나 보편성을 따지게 되고. 표현하는 법도 말하는 법도 비슷비슷해지고. 이렇게 모두가 무미건조해지고.


예술가와 일반 사람들의 차이는 뭘까 생각해본 적이 있는데, 가장 큰 차이는 세상을 바라보고 표현하는 정성이 아닐까 싶었다.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스쳐 지나가기 쉬운 작은 부분을 포착해서 애정을 들여 바라보는 것 같고, 나와 같은 사람들은 작품에 녹여진 예술가들의 그런 애정 어린 시선을 느끼며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우는 것 같고.


일에 매몰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느끼는 방법을 잊게 된다. 지쳐서 세상에 대한 애정과 정성도 잃어버린 채. 뜬금없게도 이것이 내가 꾸준히 운동을 하는 가장 큰 이유다. 애정 어린 시선에 '굳이?' 라고 의문을 제기하기보다 '기꺼이' 느끼기 위한 힘을 확보해두기 위해서. 사랑을 잃지 않기 위해선 기본 체력이 필요하니까.


이슬아 작가도 '사랑할 힘과 살아갈 힘은 사실 같은 말인지도 모르겠다'는 말을 했다. 기꺼이 세상에 대한 사랑이 담긴 시선과 표현을 잃지 않기 위해 나는 내일도 (어쩔 수 없이) 운동을 하러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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