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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횡설술설 Jun 05. 2022

오래도록 함께 걸을 수 있다면

끈도 무엇도 필요없을 때

할머니 집에 강아지를 데려왔다. 요즘 들어 부쩍 할머니는 멍하니 앉아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시간들이 많아졌고, 그런 할머니가 걱정되었던 엄마와 삼촌들이 긴 고민 끝에 데려온 녀석이었다. 개를 좋아하는 내가 강력하게 밀어붙인 것도 한몫을 했다. 말티즈와 푸들이 섞여 하얗고 몽실몽실한 탓에 이름은 구름이라고 지었다. 태어난 지 오래되지 않아 작고 조그마한 구름이는 금세 가족들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우리 집 막둥이가 되었다.  



처음엔 잘 쳐다보지도 않고 정을 주지 않던 할머니는 구름이의 대책 없는 귀여움에 마음을 열었고 그 둘은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리고 더 친해진 후로부터는 새벽마다 함께 산책을 했다. 사람도 없는 이른 시간에 둘은 끈도 없이 동네를 같이 걸었다. 빨리 걷지 못하는 할머니가 천천히 걸음을 떼면, 구름이는 주변을 팔짝팔짝 뛰며 앞서 나가다가도 다시 할머니 옆으로 되돌아 왔다가 다시 앞서 나가며 걸었다. 그렇게 그 둘은 매일 같은 시간에, 같은 코스로 집 근처를 돌았다.


처음 할머니가 구름이랑 산책하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서 할머니한테 잔소리 아닌 잔소리를 했다. 그렇게 끈도 없이 산책하면 안돼, 갑자기 뛰어서 저 멀리 가버리면 어떡하려고 그래 할머니 뛰지도 못하는데. 안 도망간다 걱정마라. 아니 그걸 할머니가 어떻게 알아 게다가 아직 어린 앤데. 집 앞에서만 잠깐 하는 거라 괜찮다. 그리고 얜 도망 안 가.


안정감을 얻기 위해 산책을 하는 나로서는 믿기지가 않았다. 아직 어리고 같이 산지 그렇게 오래되지 않아서 구름이가 언제 어디로 튀어갈지 모르는데. 마음 한 구석이 조마조마하지 않나. 어떻게 그 상태로 같이 산책을 하지. 그렇게 마음 한 켠이 불안한 채로 잠깐 걷는거면 산책의 의미가 있는 건가. 그런데 막상 할머니는 편안해 보였다. 할머니의 '얜 도망 안 간다'는, 구름이에 대한 믿음은 대체 어디서 나올 수 있는 걸까.


생각해보니 나도 끈 없이 함께 산책을 하던 친구가 있었는데. 혼자서 왔다 갔다 오르락내리락하는 통에 나보다도 오히려 내 주위의 걱정을 종종 사곤 했는데, 정작 나는 그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이 있었다. 오르락내리락 해도 내 리듬 안에서, 내가 커버하는 범주 안에서 왔다 갔다 할 거니 괜찮다, 어디 안 간다는 믿음으로 그를 끌어안았던 때가 불현듯 떠올랐다.


아직도 믿음이 뭔지 잘 모르겠다. 어느 순간에, 어떻게 하면 생기는 것인지. 진짜로 믿는 마음인 건지, 아니면 그저 믿고 싶은 마음인 건지. 다만 서로를 처음 알게 되고, 서로 지켜보다가 조심스럽게 용기를 내어 마음을 트고, 밥을 함께 먹고, 함께 걷는, 그 일련의 함께 하는 단단한 순간들 사이 어느 즈음에 알게 모르게 생겨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믿음이란 그저 믿고 싶은 마음일 뿐이라 할지라도 이것 역시도.


그냥 함께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 나란히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조곤 조곤 아무 얘기나 할 수 있는, 산책이 주는 안정감을 한껏 느끼면서. 끈이나 그 무언가가 없이도, 조마조마한 마음 없이 그저 오래도록 마음 편히 함께 걸을 수만 있다면 정말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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