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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횡설술설 Sep 22. 2022

비효율의 기쁨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

영화나 드라마 요약본을 즐겨본다. 유투브에 특정 콘텐츠 제목을 검색하면 이를 요약한 콘텐츠들이 우르르 뜨는데, 요즘엔 이 요약본도 어찌나 맛깔나게 만드는지. 보고 나면 마치 이 영화나 드라마 전체를 다 본 것 같은 착각을 심어준다. 이 요약본이라는 위대한 것은 궁금한 콘텐츠는 많고 시간은 상대적으로 없다고 느껴지는 나에게 최적의 효율로 콘텐츠를 소비할 수 있도록 해준다. 게다가 숏폼 비디오 트렌드에 따라 15초 내의 짧은 영상 위주로 sns 피드를 슥슥 넘기던 요즘의 습관에도 잘 맞다.


그러다 오랜만에 영화 하나를 추천받게 됐다. <안경>이라는 일본 영화였는데, 소개 글에서부터 '슬로우 무비'라고 쓰여있었다. 요약본을 찾아볼까 하는 충동이 잠깐 일었다. 그래도, 추천받은 거니까. 마음을 다잡는다. 이건 처음부터 끝까지 제대로 된 한 편으로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영화를 틀었다. 그리고..역시나 힘들었다. 소개 내용에 맞게 영화 전반의 호흡이 굉장히 느릿느릿하고 여유로웠다. 인물들이 아무 대사 없이 멍 때리는 장면에서는 빨리 감기 하고 싶은걸 참고 집중하기 위해 모니터를 붙들어야 했다.


힘겹게 영화 한 편을 끝내고 나니 문득 씁쓸함이 몰려왔다. 내가 언제부터 무언가를 보는 데 있어서 이렇게 참을성이 사라졌나. 대학 시절 들었던 영화 제작 수업이 떠올랐다. 한 장면 장면, 등장인물의 한 동작 동작 모두가 아무 이유 없이 들어간 게 아닐 텐데. 언제부터 내가 콘텐츠를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효율을 따져가며 단순히 '소비'하게 된 건지. 요약본을 통해 그 콘텐츠가 어떤 내용인지는 알게 되었지만 그로 인해 마음이 지릿해지는 경험은 할 수 없었다. 겉숨으로만 호흡하다가 복식호흡하는 법을 잊어버린 느낌이었다.


하나의 콘텐츠 자체를 깊게 파고드는 힘을 다시 길러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게 책이 됐든 영화가 됐든, 인물의 대사 하나 시선 한 번을 찬찬히 느껴봐야겠다. 단순히 얕은 지식을 넓히는 것보다 나의 생각이 깊어질 여지와 그릇의 크기를 넓히는 것이 결국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살아가는 데에 더 도움이 될 거라고 믿는다. 오랜만에 기쁘게 비효율을 누려야겠다. 진득하게 사치를 부려야겠다. 무엇이든 효율을 따지며 빠르게 쳐내는 환경에서 나만의 여유 시간에만 누릴 수 있을 최고의 호사일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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