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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횡설술설 Oct 14. 2021

내가 진짜 MBTI 신봉자는 아닌데

좋은 말은 언제 들어도 좋지


누워서 인스타그램을 슥슥 넘겨보다가 MBTI 같은 유형 테스트를 봤다. 나와 어떤 철학자의 사상이 가장 비슷한지 발견해보라는 거다. 가뜩이나 요새 온갖 유형 테스트가 판을 치고 있어서 '이젠 제발 적당히 좀 해..!!' 하며 넘기려다가 흠 근데 이번엔 철학자라고? 하면서 궁금한 마음에 또 해보고 말았다. 알고 보니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라는 책을 홍보하기 위한 광고였다. 이렇게 이번에도 매끄럽게 흐름을 타고 결국 책까지 사고 말았다. 무서운 광고의 세계란.. 광고회사에 다니고 있으면서도 매번 이런 거에 홀라당 넘어가다니 나는 참된 소비자. 내가 타깃으로 하는 소비자들이 딱 나정도만 돼도 무척 기쁠 것 같다.



테스트 결과는 소로가 나왔다. 코가 크고 철딱서니 없고 유아적인 철학자라고 (..)



작년인가부터 갑자기 MBTI를 시작으로 이런 테스트가 엄청 유행했다. 이 현상에 대한 각종 리포트를 읽어보면 젊은 세대들이 공감대를 형성하여 이에 맞는 친구를 만들고 싶어 한다는 얘기도 있었고,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자랑하고 싶어 한다는 분석도 있었다. 나 자체가 이미 20대가 아니어서 이러한 분석에 완전히 공감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이야기 같다.


나조차도 매번 이런 테스트를 재미삼아 해봤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친구들에게 공유하곤 했다. "얘들아 내가 진짜 MBTI 신봉자는 아닌데"를 입버릇처럼 달고 매번 그 누구보다도 철저한 신봉자처럼 권유했다. 그리고는 짧은 시간 오 너랑 맞는 거 같네 아니네 하는 얘기를 나눈다. 처음에는 정말 잘 맞는 내용이 나오면 신기해서 재밌었는데, 이제 웬만한 테스트는 다 해보고 나니 얘기가 비슷해서 재밌지도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동일한 내용을 기반으로 형태만 다르게 만드는 테스트일 텐데 내용이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겠나.


그럼에도 사람들은 왜 아직도 하고 있고 왜 공유를 하고 얘기를 나눌까. 나는 소로 결과가 나온 페이지를 왜 굳이 캡처해서 저장해두었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면 저 페이지에서 설명하는 소로의 성향, 즉 나의 성향이라고 말하는 그 내용이 마음에 들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소로를 빌려 내가 이런 사람이라고 듣는 것이 기분이 좋았기 때문에 친구들에게 그 결과를 공유하지 않더라도 굳이 혼자 캡처해서 간직해둔 것이다.



회사 다니면서, 그리고 직급이 조금씩 올라가면서 칭찬받을 일이 점점 줄어든다. 친한 친구들에게 칭찬을 들을 리는 만무하고(욕 안 먹으면 다행이다) 새로운 사람들과 관계를 쌓을 일도 줄어서인지, 엄청난 칭찬이 아니더라도 좋은 말조차 들을 계기가 크게 없다. 나 역시도 다른 사람에게 단순 외면적인 변화에 대한 언급 외에 그 사람 자체에 대한 좋은 말을 한 지가 언제인가 싶다.


그런데 사람은 부정할 수 없이 누구나 좋은 말을 들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때로는 형식적으로 하는 말임을 알면서도 내 의지와는 별개로 이미 양 입꼬리는 승천해있기도 한다. 나 역시도 칭찬받는걸 좋아하지만 딱히 들을 일은 없는데(혹시 내 행실의 문제인 걸까.. 돌이켜보게 된다), 이런 테스트를 하게 되면 여기에 쓰인 좋은 말로 한번 기분이 좋아지고, 이를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며 "맞아 너 이런 좋은 점 있어"라는 말을 들으면 두 번 기분이 좋아지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런 거 보면 사람은 엄청 복잡하다가도 단순하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이 MBTI 나 유형 테스트 결과를 자꾸 공유하는 걸 보면 혹자는 '그런 몇 안 되는 통계치와 분류 기준에 얽매이지 말라'고 하는데 이게 중점이 아닌 것 같다. 사람들도 대강은 알 것이다 이게 맹신할 결과가 안된다는 것을. 이 세계에 사는 수많은 사람들을 고작 16가지로 분류가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은 극히 드물 테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테스트에 호구처럼 또 넘어가게 되더라도, 그날 나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줄 거라는 명목 하에 "내가 진짜 MBTI 신봉자는 아닌데" 오늘도 슬그머니 테스트를 해본다. 소로처럼 유아적이지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런 테스트 대신에 주위 친구들에게 평소에 좋은 말들을 자주 해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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