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것의 모습 그대로
띵동. 사내 메신저가 왔다. 팀장님이 보낸 피드백 확인하라는 내용이다. 리뷰받은 ppt 파일을 열어보니 피드백 내용이 담긴 빨간 딱지가 여기저기 붙어있다. 반영해서 수정한다. 다시 수정한 버전을 팀장님한테 보낸다. 그의 피드백을 기다린다. 이번엔 노랑 딱지가 붙은 파일이 온다.. 최소 이 과정을 5번 정도 거치며 빨주노초파 딱지를 모두 받아보고 나서야 하나의 작업물을 겨우 완성해서 내보낸다. 후압.
직업상 어떤 작업물을 만들어도 퇴고가 필수다. 최소 한두 명의 다른 이에게, 여러 번의 리뷰를 거쳐 완벽한 상태의 결과물을 내보내야 한다 - 는 꼼꼼한 완벽주의자 마인드를 회사 다니며 알게 되었고 지금도 여전히 배우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헐렁이 딱지를 못 떼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7년 정도 일을 이렇게 하다 보니, 나의 것을 만들 때도 습관적으로 이렇게 하게 된다는 거다. 글을 쓰거나 믹스셋을 만드는 등 어떠한 작업물을 만들 때도 스스로 여러 번의 수정을 거치게 되는데, 이게 보고 또 보다 보면 갑자기 내 작업물이 싫어지는 순간이 온다. 내가 어떤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쉬는 시간에 이런 걸 만들고 있지? 하는 현타(!)가 갑자기 찾아온다거나, 나도 모르게 질리게 되기도 한다. 무엇보다도 내 작업물에 대한 애정이 가장 많이 떨어지게 되는 순간은, 처음에 담겨있던 날 것의 감정이 여러 번의 셀프 리뷰를 거치며 많이 정제되어버린 걸 알았을 때다. 이럴 때는 가장 무의미해지고 의지도 사라져서, 일시적으로라도 작업하던걸 멈추고 옆으로 밀어두게 된다.
물론 퇴고를 거쳤을 때의 장점도 많다. 맨 처음에 했던 것보다 퀄리티를 더 높일 수 있고, 방향성이 틀리지는 않았는지 전체적으로 어긋나는 부분은 없는지를 살피며 더 그럴싸한 모양새로 다듬을 수도 있다. 실제로 글은 고치면 고칠수록 좋아진다며 퇴고의 중요성을 외치는 유명한 작가들도 많다.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도 "모든 문서의 초안은 끔찍하다. 그래도 죽치고 앉아서 쓰는 수밖에 없다. 나는 <무기여 잘 있거라>를 39번 새로 썼다."라고 말했으며 소설가 은희경도 "저는 초고를 절대 남에게 보여주지 않아요. 그걸 고치고 또 고치고 해서 겨우 한 편 만들어내는 거죠."라고 했다. 이쯤 되면 퇴고를 하는 것이 너무도 중요하고 당연한 단계로 보인다.
그러나 나는 하나의 사회적인 직업으로서 다 함께 약속된 어떤 결과물을 양산하는 게 아니라면, 적어도 내 개인적인 삶에서만큼은 퇴고하지 않는 야생의, 날 것 그대로의 모습으로 나를 내보이고 싶다. 어차피 나 혼자 만들어내는 것들은 누가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의, 내 개인적인 만족이 중요한 거니까. 누군가와 거래를 할 필요도, 누군가를 만족시킬 의무도 없는 와중에 글 시작을 '띵동'으로 할지 '딩동'으로 할지 고민하는 시간 자체가 무의미하다. 자유로운 상태에서 만들어내는 나만의 결과물만큼은 퇴고하고 싶지 않다. 그냥 내가 처음에 담았던 날 것의 감정 그대로를 온전히 담아 나를 표현해내고 싶다. 모양새가 좀 들쑥날쑥 이어도 뭐 어때.
야생의 모습 그대로를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