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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이너프 Feb 07. 2024

나르시시즘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가

현대는 나르시시즘의 시대라고도 불리운다. 그만큼 가치 있는 존재라는 자기 확인이 무엇보다 중요하고, 그러한 느낌이 적절히 주어지지 않을 때 이를 보상하기 위한 다양한 문제들이 생기곤 한다. 이는 단순히 성격문제뿐 아니라 우울증, 불안장애 같은 심리 질환과 심지어 사랑을 주고받는 관계에 있어서까지 그 밑바닥에 뿌리 깊게 놓여있는 경우가 많다.




나의 말에 귀기울여주고 있는 그대로의 내가 존중받는 적절한 나르시시즘적 만족이 부재했을 때, 한 사람의 내면 세계에는 어떤 것이 생기게 될까? 그것은 물론 개인의 기질에 따라, 그 사람이 자라온 환경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그렇지만 근원적으로 공통되게 내면에 자리잡는 것이 바로 Shame, 즉 수치심이다. 수치심이란 표현은 일상에서도 자주 쓰인다. 특히 남들 앞에서 무언가를 제대로 못하거나 나의 약한 면모가 드러나거나 했을 때의 창피함을 표현하는 말로 많이 사용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적인 상황에서 느끼는 창피함 혹은 부끄러움(shyness)은 나르시시즘의 상처와 관련이 있는 수치심(shame)과는 상당히 구분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죄책감 또한 마찬가지로 수치심보다는 위의 창피함과 부끄러움에 더 가깝다. 이는 내가 지켜야 할 양심이나 도덕적 기준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행위(doing)에 대한 가책이다.


이와는 달리 수치심은 행위에 대한 가책이나 어떤 특정한 것에 대한 부족함이 아니라 존재 그 자체(being)에 대한 근원적인 무엇이다. 스스로가 그 자체로 쓸모 있지 않은, 무언가 결함이 있는 존재라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것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이 이 같은 감정을 느끼면서 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러한 '무가치감'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경우가 많아서 잘 의식되지 않는다. 그래서 더더욱 그 사람의 감정과 행동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자각하지 못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을 괴롭히며 특정한 행동을 반복하도록 몰아가는 무의식의 특성인 것이다.


의식되지는 않지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말이 이해가 되는가? 나는 나이고, 내가 어떤 행동을 하는데는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는 것인데 말이다. 그렇지 않다는 것이 정신분석의 기본 입장이다. 유능하고 남부럽지 않은 사회경제적 지위를 가졌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을 옆에서 지켜보는 그 누구도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결코 알 수 없었다. "나는 쓰레기 같은 사람이야". 그는 늘 자신에게 이런 말을 되뇌이곤 했다.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적지 않은 돈을 벌 만큼 성공한 그는 늘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했다. 스스로에게 그렇게 말해야 할 만한 이유가 없을 때조차도 그랬다. 자신 또한 부족한 것 없이 열심히 잘 살고 있는데도 그런 목소리가 올라오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처럼 수치심이란 것은 온전히 자각되지 않은 채로 말이나 행동을 통해 불쑥불쑥 올라오게 된다.


수치심은 '자신이 쓸모 없는 존재'라는 깊은 무의식적 느낌이다. 그래서 어떤 경우에는 그것이 좋은 사람이 되고자 애쓰는 형태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늘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친절하려고 하거나, 화내고 비판해야 할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이해하는 듯 말하거나, 기부나 봉사활동 같은 행동들을 강박적으로 하는 것이다. 즉, 도덕적으로 또는 사회적으로 좋은 사람이 될 만한 행동을 함으로써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임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 안에서부터 느껴지는 '쓸모 있는 존재라는 느낌'이 부족할 때 외적인 행동을 통해 그것을 보상하려는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있는 그대로 사랑스럽지 않은 나를 사랑스러운 존재로 느껴보려는 무의식적인 시도이다.


이처럼 나르시시즘의 결핍과 그로 인한 수치심이 나타나는 형태는 다양하다. 특히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어려운 문제가 되는 것은 친밀한 관계에서 관심과 사랑을 주고받을 수 없다는 문제이다. 사실 당연한 이야기이다. 자기사랑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나 아닌 누군가'란 존재하기 힘들다. 물론 완벽한 이타적 사랑은 있을 수 없어서, 타인은 내 욕망의 투사 대상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 자체로 자기만의 욕구를 가진 독립적 인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르시시즘적 상처와 수치심은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는 것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때 타인은 어디까지나 자기의 연장으로서만 의미를 갖게 된다.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행위가 정말 '그 대상을 향한' 사랑인지 아니면 '나만을 위한' 사랑인지 겉으로 봐서는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있다. 남자는 꽤나 매력적이다. 화려한 외모에 쿨해 보이는 매혹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많은 이들에게 감탄과 관심을 받고 있고, 스스로도 자신이 그럴만한 존재라고 믿는다. 반면 이러한 모습과는 달리 다소 수줍어 보이고 자신감이 없는 듯한 여자가 있다. 그녀는 늘 뒤에서 그를 바라본다. 그가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주기를 애타게 바라면서. 그녀는 그 남자에 대한 상상으로 기분이 좋지만, 그가 자신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을 때에는 세상을 잃은 듯 혼자 슬퍼한다. 그 남자는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며, 그 여자 역시 자기 자신이 아닌 그만을 사랑한다. 그녀는 그를 가질 수만 있다면 자신은 상처받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이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나르키소스와 에코의 이야기이다. 나르키소스는 자기 자신에게 취해 있고, 에코 역시 나르키소스에게 빠져 있다. 언뜻 보면 나르키소스만 자신에게 몰두해 있는 나르시시스트처럼 보인다. 전형적인 그러한 모습이다. 그러나 에코 역시 본질적으로는 그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에코는 자신을 사랑하기보다는 타인을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녀가 사랑하는 대상은 나르키소스 그 자체가 아니라 결국 자기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녀에게 있어 하나의 이상화 대상(idealized object)이며, 이는 그녀 자신의 사랑스럽지 못한 부분을 채워주고 만족을 주는 일종의 수단으로 존재한다. 즉, 스스로 실패한 자기사랑을 가능하게 해주는 수단으로서만 나르키소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에코는 나르키소스의 겉모습 그리고 자기로부터 나온 이상화된 그의 특정 부분을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 사랑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나르키소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나르키소스도 마찬가지로 자신의 '완벽한 이미지'를 지속시켜주는 수단으로서만 에코에게 관심을 가질 수 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서로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


나르시시즘이 초래하는 가장 큰 문제는 아마도 '타인에게 관심 가질 수 있는 능력'의 부재가 아닐까? 가까운 누군가와 온전히 분리된 개인으로 존재하면서 동시에 서로 사랑하는 관계가 되는 것은 그토록 어려운 일이다. 어떤 누군가에게 관심을 갖고 좋은 것들을 베풀어주는 행위는 그 자체로 분명 사랑의 행위이다. 자신의 나르시시즘을 일부 포기할 수 있을 때만 비로소 타인이 눈에 들어오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사랑의 행위가 상대의 필요나 관심사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채 오로지 자신만의 생각과 판단에서 이루어진다면 거기에는 이미 타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상대는 나의 욕구를 위해서만 그곳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대개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는) 수치심의 강력한 힘인 것 같다. 자기 스스로가 가치 있고 괜찮은 인간이라는 확신이 내면에서 충분하지 않다면, 당장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어떻게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가 있을까?

       



내 사랑은 얼마만큼이 '그 사람'이고 얼마만큼이 '나 자신'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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