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르시시즘(Narcisissm)이란 용어는 요즘 널리 사용되고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익숙하다. 유튜브 같은 플랫폼에서 연애나 정신건강 관련 콘텐츠를 다룰 때 자주 등장하기 때문인 것 같다. 주로 잘난 척하며 자기를 뽐 내거나 타인을 시기하며 착취하는 사람에게 "그 사람 나르시스트야"라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나르시시스트라고 하면 이렇게 자기 자신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고, 존재감을 과시하며, 남에게 해를 끼치는 유형의 인간을 대표적으로 떠올린다. 물론 이러한 특성들도 부분적으로는 나르시시즘의 증상이며, 특히 자기애적 성격장애를 진단할 때 매우 중요한 기준들로 사용된다.
그러나 저러한 특성들만으로는 '자기애'라는 현상을 온전하게 설명하기 어렵다. 나르시시즘은 거울, 시선, 보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 된다. 영국의 정신과 의사인 제레미 홈즈(Jeremy Homes)의 저서 '나르시시즘'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르시시즘은 거울로부터 시작된다". 자기 사랑이 거울로부터 시작된다는 말이 무슨 의미일까?
사실은 자기를 사랑하게 되기 이전에 이미 모든 사람은 거울을 만나게 된다(물론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한 인간이 생을 시작하게 되는 그 순간부터 거울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 거울은 바로 태어나서 가장 처음으로 안아주고 바라봐주고 속삭여주었던 최초의 대상을 뜻한다. 많은 경우 우리를 낳고 길러준 양육자다.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는 무기력한 아이에게 이 최초 대상은 아직 살아 있는 엄마도, 고유한 성격과 인격을 지닌 인간도 아니다. 그저 내가 하는 모든 것을 그대로 비춰 보여주는 거울일 뿐이다. 내가 웃으면 눈 앞의 그 거울이 따라 웃는다. 내가 울면 그 거울 또한 무언가 심기 불편한 얼굴이 된다. 이 뿐만 아니라 내가 표현하는 그 어떤 행동이나 몸짓에도 따라서 반응해준다. 만약 내가 웃을 때 그 대상이 따라 웃어주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그렇다. 세상에 태어난 존재에게 처음 만나는 그 대상은 거울로서 존재한다. 그리고 그렇게 비춰주고 반응해주는 일들이 일어남에 따라 아이에게는 무의식적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 사람의 시선'이란 것이 스며들게 된다. 이 '시선'이란 것은 매우 강력한 힘이어서 아이가 자라고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계속 삶에 관여하게 된다. 무의식적으로 스며든 그 사람의 시선. 그게 무슨 뜻일까? 시선은 단순히 바라보는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시선, 즉 본다는 것은 바라보고 있는 그 대상을 눈과 마음 속에 담는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볼 때는 그저 '보기만' 할 수도 있고 지긋이 '바라볼' 수도 있다. 그저 보기만 할 때에는 그 대상이 오롯이 눈과 마음에 담기지 않는다. 여기에는 호기심과 관심이 필요하다. 바라본다는 것은 아마도 그런 의미일 것이다. 아이는 자기 앞에 있는 양육자, 즉 거울 대상이 자신을 그저 무관심으로 흘기는지 아니면 정말로 자신의 감정과 반응을 살피며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를 민감하게 감각할 수 있다. 거울이 존재하지 않을 때는 내가 웃어도 거울은 따라 웃지 않고, 내가 두려움으로 몸서리쳐도 다른 곳을 비추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나르시시즘의 시작이다. 보살펴주는 그 최초 대상의 눈 속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담겨 있었는지에 대한 무의식적인 기억과 각인. 그 속에서 자신이 기뻐하며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담겨 있었는지 아니면 해소할 길 없는 불쾌감이나 무서움에 떨고 있었는지에 따라 자기 자신에 대한 느낌(sense of self)이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만약 전자라면 나는 행복한 사람이고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느낌이, 후자라면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사랑스럽지 않은 존재라는 믿음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요즘 흔히 이야기하는 '자존감(self-esteem)'의 근원적인 토대가 된다. 이처럼 여러 자기계발서나 심리학 서적에서 말하는 메시지들과는 달리 자존감이란 것은 근본적으로 내가 아닌 '나에게 가장 중요한 그 대상'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나르시시즘에 또 하나의 상처를 준다. 내가 나를 온전히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해 저항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할 때 또 다른 문제들이 임상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이렇듯 한 사람의 기본적인 자신감과 자존감은 최초 대상의 눈에 어떤 모습으로 담겼느냐에 따라 상당 부분 결정된다. 그렇다면 왜 지금의 시대에는 이러한 나르시시즘의 문제가 더욱 두드러질까? 크게는 지난 수십년 동안의 사회문화적 변화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공동체가 건재해서 주변에 돌봐주며 관계 맺을 사람들이 많았던 과거에는 이러한 자기애의 문제가 크게 부각되지 않았다. 아직 '나'보다는 '우리'가 더 중요했던 사회적 분위기에서는 돌봄과 관심을 얻을 기회 또한 더 많았을 것이다.
예를 들어 프로이트가 살았던 20세기 초 또는 우리나라로 치면 70~80년대 즈음까지는 공동체라는 것이 있었고 개인이 삶의 무대에 전면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다. 그래서 프로이트가 환자들을 치료하던 시기에는 집단의 규범에 어긋나는 행동을 했을 때의 죄책감과 관련된 신경증을 호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표적으로 성적인 표현에 대한 엄격한 분위기로 인해 그러한 욕구들을 억누르게 되고, 그것이 결국 심리적 갈등과 증상을 일으키는 히스테리 환자들이 정신분석치료의 주요 대상이었다. 그런데 자본주의의 발전과 함께 가족과 공동체의 단위는 축소되었고 비로소 '개인'이 등장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개인에게 관계를 통한 관심과 교류의 경험은 과거와 달리 매우 빈약해지고 말았다.
그래서 현대 정신분석가인 하인츠 코헛(Heinz Kohut)은 더이상 프로이트 시대의 성적 억압과 죄책감으로 인한 신경증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새로운 양상의 심리적 장애가 생겨났다고 본 것이다. 코헛은 이것을 '자기의 문제'라고 보았다. 다시 말해 현대의 다양한 정신병리를 자기(self)의 결함으로 인한 '자기애성 성격장애'로 진단한 것이다. '자기'에 문제가 생겼다는 말은 결국 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애착과 인정, 즉 시선에 담겨지는 경험이 부재하다는 것을 뜻한다. 특히 요즈음 어린 아이들은 엄마의 관심을 두고 스마트폰과 경쟁해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생애 초기 반응하고 빛나게 해주는 거울 대상을 만나지 못하면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강한 느낌이 생겨나지 못한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많은 정신병리와 심리적 고통의 밑에 깔려 있는 '자기의 결함'이다.
누군가를 온전히 눈 속에 담기 위해서는 최초 대상이 거울로서의 기능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즉 부모 자신이 자기가 아닌 다른 존재를 담아낼 능력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개인주의적이고 부와 성취 획득이 삶의 중요한 목표가 되는 현대 문화에서는 어른이라고 해도 이러한 과정을 충분히 잘 수행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 부모 역시도 자신의 최초 대상으로부터 실망과 좌절을 겪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나 아닌 다른 존재를 제대로 바라봐줄 수가 없게 된다. 그것이 아무리 사랑스러운 자식이라고 해도.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그렇게 되는 것이다. 타인의 눈을 깊이 들여다보고 진심어린 관심을 줄 수 있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이 중요한 존재가 주는 사랑스러운 시선에 담겨보아야만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