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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굿이너프 Jan 23. 2024

삶의 다양한 갈등은 어디로부터 시작되는가

앞 장에서 한 사람의 삶의 방향을 결정짓고 어떤 운명적인 이끌림을 초래하는 무의식적인 힘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마치 오이디푸스와 그의 부모가 어떤 신탁의 예언에 이끌려 주체적인 선택이 아닌 서로를 파괴하는 선택을 해야만 했던 것처럼. 다시 말해, 알 수 없는 힘으로 주체들의 인식 밖에서 작용하는 힘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인식되지 않는 어두운 영역은 어디서부터 어떤 모습으로 생겨나게 될까? 그리고 그것은 한 개인의 삶에 어떤 결과들을 초래하게 될까?




모든 인간은 갓난 아이로 태어난다. 갓 태어난 아이는 부모로부터 생존을 보장 받으며 성장하게 되고, 점점 자라서 영아가 되고 유아가 된다. 영아는 24개월까지의 시기를 가리킨다. 이 시기는 대략적으로 어머니로부터의 분리가 점차 일어나기 시작하는 시기이다. 생애 초기에 아이는 엄마에게 의존하고 늘 붙어 있으면서 엄마를 자신과 분리된 존재가 아닌 자신의 일부로써 지각한다. 이때는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지각도 거의 일어나지 않는데, 아직 엄마와의 밀착관계 속에서 미분리 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머니를 자신의 연장된 어떤 부분정도로 지각하는 시기를 지나서 대략 36개월을 전후로 자신이 어머니와 분리된 개별적 존재라는 감각이 생겨나게 된다. 즉, 아직 제삼자인 아버지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은 것은 아니지만, 엄마가 붙어 있지 않아도 세상에 대한 흥미를 가질 수 있으며 타인과 구분되는 개별적 존재인 '나' 대한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생애초기 '나-엄마' 사이의 이자관계에서 충분한 돌봄과 신뢰를 느끼지 못하면, 어른이 되어서도 세상을 신뢰할 수 없게 된다. 세상은 위험하고, 타인은 나를 시기하고 미워한다는 편집적인(paranoid) 믿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자신이 온전히 사랑받을 만하고 괜찮은 면이 있는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자존감 형성에 실패하게 만든다. 세상은 나를 미워하고 박해(persecution)하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무의식적 두려움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는 결국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가 인정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생애 초기 어머니로부터의 분리 단계를 지나 만 5세 정도가 되면 드디어 이전과는 전혀 다른 심리적 발달의 단계로 들어서게 되는데, 바로 오이디푸스 시기이다. 대략 5~7세 정도로 볼 수 있는 이 순간은 어머니와의 일대일 관계에 어떤 심리적 공간이 생기고 그 사이로 제삼자인 아버지가 들어오게 되는 시기이다. 이로써 제삼자였던 아버지가 긴밀했던 '나-엄마' 사이에 들어오게 되고 삼자관계의 틀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는 오이디푸스 이전 시기와는 전혀 다른 관계의 양상과 발달이 시작된다는 의미이다. 사실 대부분의 성인기에 겪는 문제들은 보통 이 두 중요한 시기 동안에 부모가 어떤 방식으로 나를 대했고, 그들과 어떤 경험을 했느냐에 의해 상당 부분 결정된다고 볼 수 있다. 어쨌거나 오이디푸스기까지 발달이 잘 이루어지게 되면, 비로소 내가 엄마의 유일한 하나뿐인 존재이고 나와 엄마 사이에 그 누구도 들어올 수 없다는 유아적 환상이 조금씩 거두어지게 된다. 아버지가 나와 엄마 사이에 중요한 존재로써 자리잡을 수 있고, 실은 엄마에게 있어 내가 유일한 대상이 아니며 엄마가 정말로 사랑하는 대상은 제삼자였던 아버지일 수 있다는 사실 또한 수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삼자관계에 대한 수용은 향후 다양한 사회적 관계를 할 수 있게 하는 바탕이 된다.


어릴 적에 나는 엄마를 무척이나 좋아했었고 어느 날 엄마가 누군가와 전화를 하는 것을 적이 있었다. 그 내용은 대략 어떤 남자 아이를 걱정하는 내용이었다. 아마 친구의 아들이지 않았을까 싶지만 그때 누구인지도 잘 모르는 그 친구에게 묘한 질투심이 느껴졌던 기억이 있다. 늘 아들만을 좋아해주다가 딱 한번 다른 아이에게 관심을 보인 것인데도 그랬다. 엄마의 관심을 독차지하고 싶은 어린아이의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이처럼 유아 시기에는 아버지가 될 수도 있지만, 엄마의 관심을 차지하는 대상이라면 그 누구라도 제삼자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한다는 것은 (물론 다른 의미도 있지만) 가장 가깝고 친밀한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내가 소외된 제삼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다. 이 발달 과정에 문제가 생기면 나중에 성인이 되고 연애와 결혼을 할 때 그와 관련된 문제가 터져나오게 된다. 늘 나와 내 연인 사이에 누군가가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되는 것이다.       


결국 한 인간으로서의 나만의 가치를 신뢰할 수 있고, 나아가 내가 누군가에게 유일하게 소중한 단 하나가 아님을 수용하는 능력은 발달 단계의 시기 동안 자라난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른이 된 지금은 다를까? 결국 대부분의 사람이 겪는 삶의 고통의 대부분은 저것들에서 그 근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가치 있는 사람이고 싶다. 한 인간으로서, 고유한 존재 자체로서 말이다. 또한 모든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이길 원한다. 그 사람에게 유일한 사랑의 대상이고 싶은 마음이다. 너무 자연스러운 것들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의 발달 과업이 해결되지 않을 때 대부분의 심리적인 문제가 생겨나게 된다. 만약 내가 그 자체로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확신이 내면에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하면, 자신이 살아 있음을 계속해서 확인해야만 한다. 어떻게 확인해야 할까? 무엇을 계속 찾아 헤메게 될까? 자기애성 성격(narcissistic personality)을 가진 사람에게 두드러지는 '찬사를 향한 열망'도 그중 하나이다. 감탄받는 존재가 됨으로써 순간적으로 자신이 살아 있는 존재라는 확인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찬사가 더이상 주어지지 않을 때는 자신의 쓸모를 확인할 길이 없게 된다. 또한 이 시기에 안정되고 일관적인 애착경험이 부재했던 사람은 연애나 결혼을 할 때 부모와 같은 돌봄을 줄 것 같은 사람을 사랑대상으로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이성으로서 그리고 동등한 성인으로서의 만남이 아닌 자신을 칭찬해주고 온전히 돌봐주는 부모의 역할을 상대에게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데 보다 나중 시기인 오이디푸스기의 문제는 이러한 존재 자체로서의 확인과는 조금 다르다. 이때는 한 인간으로서의 존재 가치는 어느 정도 인정이 된 상태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바로 '내가 사랑하고 원하는 그 대상'에게 중요한 존재일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마치 엄마가 나만을 위한 사람이 아니고 나는 그저 엄마와 아빠 사이에 있을 뿐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아이처럼, 사랑하는 사람이 떠날 것 같은 불안함을 안고 살게 된다. 늘 질투하고 불안해하면서 상대를 내 옆에만 붙들어두고 싶어 한다.


대학원 마지막 학기에 들었던 정신분석 수업. 교수님이 갑자기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내가 너 때문에 힘들다는 말을 들으면 기분 좋지 않아요?" 그게 무슨 의미였을까. 누군가 나 때문에 힘들다는데 그게 어떻게 기분 좋은 이야기일 수 있을까. 오히려 기분이 나쁠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러자 교수님이 했던 말이 기억이 난다. "김정운이 되게 건강한 척 하네". 그러나 이야기를 풀어보면,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당신 때문에 신경쓰고 고민하고 힘들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내가 그 사람에게 어쩌면 가장 중요한 존재가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사실은 설레는 말이다. 동시에 누군가에게 유일한 존재 비스무리한 것이 될 수 있음에 감사한 일이다. 그 이야기를 살면서 들어본 게 몇 번이나 될까? 그건 '나는 당신에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를 고통받게 하면서도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만드는 그런 말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이유로 행복하기도 하지만 고통받고 슬퍼하며 살아간다. 피할 수 없는 것들이다. 물론 그 고통과 슬픔의 모양새는 사람마다 제각기 다르다. 누구는 가족, 누구는 연인, 누구는 친구 관계, 누구는 미래에 대한 불확실함, 누구는 마음에 안 드는 자신의 성격, 그리고 누구는 이유 모를 무언가로 인해. 그러나 각자의 인생에 서로 다른 얼굴로 나타나는 그 고통의 근원이 크게 보면 결국 앞서 말한 것에 있다는 것은 개인적인 생각으로도, 상담 및 정신분석 임상의 여러 관찰로 보아도 그렇다. 한 독일의 정신분석가는 "좋은 것이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 의존해야만 한다는 사실, 부모가 계시고 나는 소외된 제삼자라는 사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죽음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합니다. 인간의 심리적인 문제들은 이 세 가지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없이 많은 형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라고 했다. 그렇다. 가치 있는 한 사람이라는 기본적인 자기감각 그리고 내가 원하는 그 대상에게 중요하지만, 그 사람이 나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할 때 삶의 많은 문제들이 생겨나게 된다.




당신의 고통의 근원은 어디에 있나요? 그리고 지금 당신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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