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몸이 서로 닿는 경험을 어떤 말로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스킨십에 관해 많은 이야기를 하곤 한다. 특히 젊은 남녀에게는 가장 원초적인 만큼 할 이야기가 많은 키워드이다. 그러한 신비로운 혹은 때로 불쾌감을 주기도 하는 그 경험이 단지 본능적인 체험 외에 또 어떤 의미가 있을 수 있을까? 여러분들은 스킨십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누구는 가까운 사람과 몸이 서로 닿는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고(아마 많은 경우에), 누구는 그것에 대해 꺼림칙하고 불편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다. 친밀한 관계에서의 스킨십은 대개 좋은 것으로 여겨지지만, 꼭 그렇지는 않다. 각자가 겪어온 관계 경험에 따라 마냥 긍정적인 것에서부터 불편한 것, 내키지 않는 것, 두려운 것, 위협으로부터 보호해 주는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상을 가질 수가 있다. 살면서 특별한 외상 경험이나 상처 없이 가까운 사람과 안정적인 유대감을 형성한 사람은 대개 스킨십을 안전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삶을 더 풍요롭게 해주는 좋은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이승우 작가의 소설 '사랑의 생애'에는 스킨십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는 한 인물이 등장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다른 목적으로 사용할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이다. 등장인물 영석은 다른 등장인물인 선희를 사랑한다. 둘은 연인 관계이며, 선희 역시 영석을 사랑하고 있다. 영석은 유독 내면의 불안이 많고, 엄마처럼 자신을 보살펴주는 존재를 그리워하는 사람이다. 반면 선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그녀에게는 큰 결핍 같은 것은 없으며, 대체로 모난 것 없는 여자다. 영석에게는 특이한 습관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선희의 모든 신체 부위를 가리지 않고 만지는 것에 유독 집착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성감대뿐만 아니라 귀와 발 등 어딘가를 만지는 것 자체에 몰두하곤 한다. 선희가 씻지 않았다고, 원치 않는다고 해도 영석은 그것을 멈추지 못한다. 참 이상해 보이는 모습이다. 물론 사랑하는 사람의 몸을 만지고 싶은 것은 자연스러운 욕구이다. 그런데 영석이 집착하는 저런 부위들은 일반적인 성적 표현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들이라는 점이 문제다. 영석은 왜 저러한 행동에 집착할까? 저러한 취향을 가진 것일까? 적어도 정신분석적 관점에서 볼 때, 일반적이지 않은 성적 욕구 중에 그저 우연한 취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한 행동의 이유를 묻는 선희의 질문에 영석은 대답한다.
"닿으려고 그래. 닿아 있으려고."
그렇다. 성의 목적에 대한 관점은 다양하지만, 가장 본질적인 심리적 요소는 바로 닿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영석은 닿기 위함이라고 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무엇에 닿고 싶은 것인지는 말하지 못한다. 실제로 영석뿐 아니라 성적 접촉이나 스킨십을 하는 당사자들은 닿으려는 그 '목적지'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언뜻 보기에 이성의 신체 그리고 성적인 목적을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영석이라는 사람에게 스킨십은 그것 자체를 목적으로 한 순수한 것이 아니다. 그에게 여자친구의 존재 또는 그녀의 신체는 자신이 살아 있다는 감각을 고양시켜 주는 하나의 통로일 뿐이다. 영석에게 몸과 몸의 접촉은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해 주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다. 그는 선희를 제대로 사랑하기보다는 선희를 통해 자신을 사랑하려는 단계에 머물러 있다.
많은 경우에 성(sexuality)이란 것은 이러한 역할을 한다. 인간의 성은 단지 생식이나 성욕 해소를 위한 생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보다 정신적인 것이다.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존재감을 일으킬 뿐 아니라 타인보다 더 뛰어난 존재라는 우월감, 미워하는 대상을 파괴하고자 하는 공격성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본능적이고 어두운 정신적 영역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특히 사람마다 살아온 환경과 서사가 다르기 때문에 성을 향유하고 스킨십에 관여하는 태도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왜 하필 그것이어야 할까? 다른 자극적인 것들도 많을 텐데 말이다. 그건 인간이 본능적으로 성적인 욕구를 타고나며, 그 자연스러운 욕망이 심리적 결함을 덮어주는 가장 유용하고 강력한 도구로 쓰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성적인 것을 통해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고 부족한 점을 채우는 사례들은 많다. 인간의 이러한 본능은 흔히 견딜 수 없는 자신을 잊어버리고 가치 있는 존재가 된 것 같은 고양감과 자주 결합된다. 어떤 남성에게 끊임없는 에로틱한 욕망은 자기가 속한 사회의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한 남자로서 마땅한 책임과 그에 따르는 기쁨을 느끼지 못할 때 일어날 수 있다. 이때 에로틱한 욕망이란 정상적인 범주의 욕망이 아닌 일탈적이고 집착적인 것이 된다. 사회적 존재로서 의미 있는 좋은 관계들을 맺지 못하거나 명확한 비전에 따라 살지 못할 때 에로틱한 욕망은 일그러지기 시작하고, 진정한 삶의 기쁨이 무한한 자극적 쾌락으로 대체된다. 여성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남성에 비하면 성을 통한 자존감 추구는 덜 눈에 띈다. 그러나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여자로서 가까운 사람들로부터 사랑받는다는 느낌이 부족하거나 의미 있는 사회적 가치들로부터 멀어져 있을 때, 성적인 접촉은 잠시나마 사랑받는 존재가 된 것 같은 자극을 가져다준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있어 스킨십이나 성은 일반적으로 표현되고 행해지는 그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다. 어떻게 보면 성욕 그 자체와 관련이 없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건강하고 전형적인 에로틱함과 이와 대비되는 병리적인 에로틱함이 뚜렷이 구분되어 존재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간의 성적 충동이 '무언가에 닿으려는 몸짓'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누구는 그 몸짓이 크고, 누군가는 작은 몸짓으로도 충분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의 이상향, 즉 도달하고자 하는 대상을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그것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따라서 똑같이 에로틱한 것을 갈망해도 결국에 닿고자 하는 것은 모두 다를 수 있다. 누구나 무언가에 다다르기를 소망하며 산다는 사실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다소 특이해 보이는 취향을 가진 사람도, 심지어 건전한 취향을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