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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남영 Jun 03. 2020

이유없는 마음이 만나 한낮에 뜨거웠다

그냥 당신이 좋았다


처음엔 이유가 많았다. 선한 인상이 좋아서, 말을 예쁘게 해서, 배려가 있어서, 친절해서. 무수한 이유들이 당신을 향한 감정에 무게를 더하고, 하루아침에 솟아버린 마음을 해명했다. 웃으며 나눴던 이야기를 되뇌고, 손짓과 몸짓을 곱씹으며 행복에 젖었다. 쨍한 아침해를 보며 저물어가는 노을을 떠올리지 않듯 우리가 우리에서 벗어나는 순간은 상상하지 않았다. 매번 영원이란 말에 치이면서도 또 한 번 영원이란 말에 기댔다.


당신의 말이 좋았다. 당신은 마음이 시작된 어느 흐릿한 시점을 더듬고, 당시 먼 거리에 서있던 우리를, 좀 더 긴밀해지던 우리를 차곡차곡 정리했다. 말은 우리를 더 뜨겁게 포장했고, 난 그 뜨거움이 좋았다. 그중 특별한 기억은 때로 쳇바퀴처럼 굴러가기도 했지만, 지겹지도 지루하지도 않았다. 서로에 대한 기억의 지분이 높아지고, 끼치는 영향력의 크기가 거대해질수록 우린 깊숙해졌고, 그 깊숙함에 취했다. 말로 쌓이는 기억과 취해서 던진 약속에 갇혔다. 나를 향한 당신의 생각이 애정이 되어 내리쬘 때, 가뭄 같은 건 걱정 않고 그저 안온했다.


그냥 당신이 좋았다. 당신이 반대의 사람이었다면 차가워 보여서, 주장을 내세울 줄 아는 사람이어서, 자신을 챙길 줄 아는 사람이라서, 누구에게나 친절하지 않아서 좋았을 테다. 사람들은 마음을 정의할 수 없어 믿을 수 없는 것이라는데. 마음은 마음이라서 믿을만한 것이고 이유야말로 핑계에 불과했다.


가뭄이 들었다. 땅이 메말라서 허덕이다 뜨거움을 놓았다. 질 것 같지 않던 정오는 지나갔고, 해는 저물었으며 캄캄한 어둠 속에 당신의 말과 기억과 약속이 덩그러니 남겨졌다. 우리는 '우리'였다. 그때 난 이유 없이 당신이 좋았고, 당신은 이유 없이 마음을 시작했다. 이유 없는 마음이 만나 한낮에 뜨거웠다. 사람들은 그걸 사랑이라 했고, 나는 늦은 밤 몸을 뉘이고서야 그 하루가 얼마나 따뜻했는지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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