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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모리 Jul 26. 2023

68세 석원 씨, 수영장에 가다 (1)

아쿠아로빅을 등록하다


오늘 9시는 치열했다.

내 수영강습을 두 자리 남은 아침반으로 옮겨야 했고(방문접수만 된다), 아빠 아쿠아로빅 강습을 대신 접수해야 했다(신규회원 자리가 얼마 없다).


안내데스크에 도착하니 대기의자가 열 개 남짓 있었다. 잔여석이 몇 없다고는 생각했지만 열댓 명이 와서 대기할 정도라니. 멋모르고 여유 부렸으면 큰일 날 뻔했다. 마지막 한 자리를 다행히 얻을 수 있었다.


아빠 아쿠아로빅도 원래 하려던 시간은 마감되고, 아쉬운 대로 화목 12시로 접수 완료. 이마저도 잔여 4석일 때 등록하고 보니 그새 접수 창이 닫혔다. 그래도 나쁘지 않다. 아빠는 '수고했네...' 하며 잘 듣겠다고 했다. 작년부터 내가 수영 시작하고부터, 너무 좋다고 수영, 수영 노래를 불렀던 것이 드디어 실현이 됐다. 내 숙원사업 하나를 풀었다.




나의 부모는 베이비붐 세대, IMF 위기를 포함해 생계 걱정하며 자식 키우는 데 평생을 쓴 사람들이다. 다행히 우리 자매는 부모가 자식 앞날 걱정 안 해도 되는 직장인이 되었다. 하지만 엄마는 여전히 일개미, 퇴사 후에도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서 매일 일을 나간다. 아빠는 뭐하냐고 전화하면 "그냥 앉아서 티비 보지 뭐" 한다. 


엄마아빠는 아껴살기, 자식 챙기기에 탁월한 사람들이다. 그 덕분에 나는 많은 것을 누리고 탐험하며 살았고, 이제는 당신들도 삶에 '당신이' 즐거운 요소를 좀 넣어봤으면 좋겠다. 책임감이 따르지 않는 가벼운 즐거움 말이다. 우리 자매와 그 배우자, 자녀를 돌보고 챙기는 일 말고, 순수하게 자기 자신을 위한 활동을 즐겼으면 싶었다.


물론 자아실현, 자기계발이니 하는 여가활동들은 생계 걱정에 바빴던 나의 부모에게 익숙지 않아 보인다. 그래도 내 삶에 가장 큰 기쁨인 요소들을 당신들도 한 번은 경험해봤으면 하고, 나는 호시탐탐 기회를 노렸다.


보통 "이런 거 있는데 해볼래?" 찔러만 보고 말았는데, 대체로 엄마아빠는 고사했다. 안 되겠다 싶어 이번에는 조금 더 본격적으로 나서보기로 했다.


일단 10만 원을 모험 비용으로 책정했다. 

내가 봤을 때, 두 분은 생계 외 활동을 위해 돈 쓰는 일에 저항감이 컸다. 시간도 에너지도 선뜻 내키지 않아보였지만 가장 큰 것은 '돈'인듯 싶었다.


나는 이것저것 배워보고 싶은 일에 큰 돈 툭툭 쓰는 마당에, 엄마아빠가 수영이 취미에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해 볼 비용으로 십만 원 정도는 잃어도 아깝지 않은 돈이라 판단했다. 내 묵은 체증도 씻을 수 있어서 평생 한으로 맺히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남자수영복과 수경수모 세트 3만 원, 여자수영복 4만 원, 엄마 수경수모는 내 것 여분을 주기로.

65세가 넘어서 강습비는 반 값. 수영 강습엔 영 관심이 없어보여서, 주말에 일일수영 가서 같이 걷고오자고 설득했다. 일일수영 입장료도 엄마아빠는 반 값이니 나까지 결제해도 1만 원 정도다. 


너무 괜찮은 걸! 왜 진작 실행하지 않았을까? 과거의 나를 원망하고 싶지만 많은 것이 결혼 후, 물리적 심리적 독립 후 가능해진 일임을 안다. 얼른 마음을 바꿔 지금의 나를 듬뿍 칭찬하기로 한다.


막상 수영복이 오니 아빠는 일일권으로 하냐며 한 달로 등록하자는 눈치다. 반가운 소식이다! 냉큼 여기저기 알아보고, 원하는 오후 시간 아쿠아로빅과 어르신수영 시간표를 정리해서 보냈다. 우리 시는 규모 대비 공영수영장이 정말 많다. 결혼 전까지는 우리 시가 너무 볼품없고 살기 불편하다고 느꼈는데, 이럴 때 보니 우리 시는 공공체육시설과 공공도서관이 정말정말 잘 되어 있다. 내 삶 뿐 아니라 배우자와 부모의 삶도 같이 윤택하게 하는 우리 시 인프라에 무한 감사했다.


그리고 등록일이 오늘이었다. 내 수영강습반 바꾸러 분주하게 가고 있는데, 9시 4분이었다. [아빠 수영 신청] 알람진동을 4분이나 늦게 알아챘다. 남은 자리 경쟁이 치열하다고 했는데... 횡단보도 기다리며 부랴부랴 로그인을 해 보니 아빠가 선택한 월수금 2시는 마감이고 그나마 화목 12시가 남아있었다. 여러 번 시도 끝에 결제 완료. 17,000원에 내 한을 풀었다! 



찾아보니 아쿠아로빅은 관절 통증에 좋다고들 한다. 원래 내가 모시고 다니면서 걷기라도 시켜야지, 싶었는데 아빠가 알아서 아쿠아로빅 강습을 듣는다고 하니 진심으로 행복하다.


결혼 후, 내 안에서는 부모를 챙기고 싶은 마음과,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몰두하고 싶은 마음이 상충한다. 그래서 내가 수영장 등을 '데리고' 다녀야 할 것 같은 욕심과 부담감이 있어서 가끔 벅차다. 하지만 나는 부모로부터 떨어져 나온 존재임을 스스로 되뇌먀, 부모의 삶을 내가 케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하려 한다. 부모는 내게 케어를 기대하지도 않고 부담을 주지도 않는다. 내가 흔쾌히 쓸 수 있는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쓰되, 매사 부모를 1순위로 생각하지 않는다고(지금처럼 자유시간에 부모를 찾아가지 않고 카페에서 내 일들을 정리한다고) 죄책감을 갖지는 않기로 했다.


다행히 엄마아빠가 현실적인 시간 운용을 알아서들 잘 하니, 아빠가 조금 번거로워도 수영장에 잘 가고, 엄마 퇴근 때 만나 같이 돌아오는 식으로 둘만의 방식을 찾아가겠지 싶다.


내게 아빠는 물 밖에 내놓은 자식처럼 어딘가 늘 괜히 걱정되고 불안하다. 자식은 나인데 말이다. 고맙다고 잘 다니겠다는 아빠 말에, 수영장 바닥 미끄러우니 조심히 다니라는 말로 괜히 잔소리를 덧붙인다. 


내가 같이 가서 수영장 이용방법까지 일러줘야 할 것 같지만, 그러지 않아도 아빠는 잘 할 것이다. (8년 전 태국으로 와서 나를 만날 때도, 나는 출입국 절차를 카톡으로 하나하나 읊어줬었다. 아빠는 알아서 공항 밖으로 잘 나왔다.) 


나를 이렇게 잘 키운 아빠니까, 괜한 걱정 내려놓고 아빠가 물속에서 자유롭고 시원함을 만끽하기만 응원하기로 한다. 물속에서는 아무 생각없이 그냥 가벼운 존재로 둥둥 떠다니다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아빠 허리가 곧아지며 입이 마르게 자랑해서, 엄마도 아쿠아로빅에 영업당하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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