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워내어 투명하게

by 이모리

이따금씩, 온몸의 촉수를 떼어버리고 싶다.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하고 말소리를 듣는 일상은 늘 나가떨어지는 저녁으로 끝난다. 미묘한 표정 변화나 시선부터 목소리의 고저와 빠르기까지, 모든 것이 피곤한 자극으로 여겨졌다.


왜 피곤한가를 돌아보면, 습관적으로 사람의 태도와 자세에서 많은 것을 읽느라 에너지가 닳는다. 무덤덤한 표정을 보니 나를 존중하지 않나 봐. 휴대폰을 보면서 말하다니 나에게 관심이 없나 봐. 그 상황에서 가장 나쁜 것을 골라 읽는다. 심지어 없는 행간을 파헤쳐 의미를 찾아내고, 굳이 알아봐야 도움 될 게 없는 의미까지 애써 읽는다.


가장 큰 문제는 이거다. 상대에게서 읽은 그 무엇이 다 내 책임으로 보인다. 오늘 교실에서 샤프에 긁힌 학생의 보호자로부터 장문의 메시지가 와 있다. ‘안전지도 부탁드립니다’로 시작해 길게 덧붙인 수십 개 문장에서 학부모의 분노를 읽는다. ‘내 아이가 다쳤는데 담임이 먼저 연락해서 내 기분 풀어지게, 정황을 보고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내 화를 좀 누그러뜨려 줘야지, 연락 한 통이 없어?’


메시지를 눈에 담자마자 손이 부들부들 떨리고 숨이 가빠온다. 순식간에 읽어버린 가장 나쁜 의미를 곧장 내 몫으로 삼킨다. 그 결과 남는 것은 한없는 무력감이다. 이 사람의 감정이 내 것이 아니다, 이 사람의 요구가 무조건 내 것은 아니다 스스로 말할 줄을 모른다.


온몸이 화로 휩싸여 사리분별이 안 될 때면, 언니에게 전화를 걸어 폭풍처럼 내 상황을 쏟아놓는다. 이십 년 넘은 나의 상담자로서 언니는 능숙하게 답한다. “메시지에 담긴 감정을 읽지 말고, 글의 표면적인 내용에만 답을 하면 어때?” 그제야 나는 긴 날숨을 뱉으며 그러마 한다.


사람들의 모든 문제 상황을 내가 책임져야 할 것만 같다. 남편이 얼굴을 굳히면 시간을 거꾸로 돌려 내가 뭘 실수한 게 있는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머리를 쥐어짠다. 친구가 내 말에 크게 반응하면 내가 심기를 거스르게 했는지 수습하느라 허둥지둥한다. 학생의 서랍 속이 지저분하면 내 교육자로서의 능력이 부족한 것 같고, 학생들이 급식 반찬을 한가득 버리면 이 자원낭비도 역시나 내 탓이다.


촉수를 곤두세우고 어디 또 내 책임이 있나, 뭐가 또 내 탓인가 찾느라 에너지를 허비한다. 굳이 안 써도 될, 귀한 나의 에너지를. 그렇게 허덕이다 하루가 간다. 촘촘히 뻗은 감각이 무뎌질 수 없다면,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매 순간 밀려오는 자극을 전부 내 것으로 삼킨다면, 그 어디서도 돈벌이며 인간관계를 이어갈 수 없을 것 같다.


감각한다는 건 자극이 있다는 뜻이다. 자극을 자극으로 거리 두고 볼 수는 없을까. 자극을 해석하지 말고, 소화하지 말고, 지나가는 구름으로 흘려보낼 수는 없을까.


명상 수업에서 작은 실마리를 찾았다.


「편안한 자세를 취하고 “내보내기”라고 몇 번 말해보라. 이 말을 할 때 어떤 이미지, 소리, 기억, 감정이 떠오르나? 이 말과 관련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나?」


내보내기, 내보내기, 내보내기.


숨이 턱 막히는지도 모른 채 학습해 버린, 큼직한 역할들을 가장 먼저 내보낸다. 며느리의 도리, 친절한 선생님, 예쁜 아내. 이름표를 내보내는 것만으로도 나는 한결 투명해진다.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말들도 순서 없이 내보낸다. “그냥 피곤해서 그래”, “나 요즘 너무 힘들어.” “남자들은 긴 머리를 좋아하는데 머리를 너무 짧게 자르면 좀 그렇지”, “선생님은 젊고 착해서 좋아요.”, “선생님, 그렇게밖에 못 하세요?”


기억에 뒤엉킨 사람들의 표정들도 읽어낼 여유 없이 다 밖으로 꺼내어 보낸다. 점심마다 급식실에서 스치는 500명의 얼굴들, 남편의 굳게 다문 입, 피곤해서 짙어진 그의 쌍꺼풀, 학부모의 엷은 미소, 단호한 학교장의 눈빛, 웃음기 없이 바쁘게 지나가는 동료의 얼굴, 늘어진 눈꺼풀 때문에 치켜뜬 아빠의 눈, 나와 아빠의 눈치를 살피는 엄마의 눈동자.


외부의 자극은 외부에 있다. 내 피부 바깥의 것이 내 안에 스며들면, 더 이상 외부가 아니다. 나의 해석이 감정을 부르고, 책임을 얹는다. 이 책임으로 내가 숨이 막히도록 짓눌린다면, 그래서 내가 사라지고 작아진다면, 나의 안으로 들여올 이유가 없다.


촉수는 나에게 필요한 자극을 들여오는 데 쓰여야 한다. 외부의 것으로 내부를 덮어버리는 용도가 아니다. 외부를 감각했다면 그 표정이, 감정이, 말과 태도가, 나의 생존에 이로운 것인지 판단이 필요하다. 감각했다고 무조건 내 것으로 들여올 이유는 없다. 예민한 촉수는 잘못이 없다.


숨이 안 쉬어져서 언니에게 119 구조요청 하는 날이 조금씩 줄어든다. “내보내기”라고 직접 읊조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살기 위해서는 내 안에서 많은 것을 밖으로 내보내야 함을 본능적으로 알아가는 듯하다. 마구 휘갈기던 쓰레기 같은 일기들이, 비를 맞으며 함성을 지르던 순간이, 땀을 뻘뻘 흘리며 요가 수련하던 시도들이 모두 “내보내기”라고 말하던 날들이었다. 갖은 방법으로 언니에게 내보내기를 위탁하는 대신 스스로 내보내려 애써 왔구나.


나아가 이제는 소리 내어 “내보내기”를 입 밖으로 꺼내본다. 예민한 촉수가 있던 말던 그것이 무엇을 얼마나 느끼던, 함부로 내 안에 들이지 않기로 한다. 분명하고 또렷하게, 가벼우며 가득 찬 나를 해치지 않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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