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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아들 바라기

이젠 이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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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아들 즉 나의 동생은 44살 직업군인이다. 엄마의 뒷바라지로 착실하게 대학교까지 입학했다가 1년을 다니고는 군에 입대를 했고 거기에서 특전사로 직업군인의 길로 들어섰다. 아빠가 막 돌아가신 직후의 입대라 엄마에게 경제적인 도움을 드리고 싶다는 게 이유였다. 뜻은 좋았으나 엄마의 아들은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엄마가 치질 수술을 급하게 받으셔야 할 때도 와서는 얼굴만 비추고는 병원비는커녕 월급의 단 1%라도 드린 적이 없었고 흔하디 흔한 카네이션 하나도 지금까지 사 온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아들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흡족해하셨고 군복 입은 아들의 훤칠한 모습을 자랑으로 여기셨다.


외할머니와 두 시간여의 버스를 타고 큰 삼촌댁에 도착했던 날 집에 계시던 외숙모와 사촌 언니, 오빠들은 외할머니에게 인사만 하고는 다들 각자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과일을 내어 오곤 별말씀이 없으시던 외숙모. 그리곤 별 대화가 오가지 않던 묘한 분위기 속에 내가 생각한 것은 '할머니는 대접도 못 받는 삼촌 집에는 뭐 하러 오자고 한 거야?'였다. 아무 말없이 묵묵히 앉아 계시는 할머니가 가여웠다. 12살의 나는.

그리고 훗날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어느 시점에서인지 할머니의 행동이 이해가 되었다. 지금의 엄마와 아들 관계를 보면서 말이다. 할머니는 그저 큰아들이 보고 싶어서 한달음에 달려간 곳이었다는 것을.

할머니에게 큰 아들은 시골 군 내에서 경찰 공무원으로 근무하는 아들이 당신이 하루하루를 버티는데 무척 힘이 되었던가 보다. 칠 남매를 두었지만 나의 엄마 밑으로 계시던 아들 셋을 잃고도 슬픔을 오직 절에 가서 새벽 기도를 드리는 것으로 애써 억눌러 왔을 테고 먼저 간 자식이 그리움으로 찾아올 때면 명절 말고는 찾지 않았던 큰 아들이 보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삶의 희망이 되어 주는 자식이란 이름으로.


엄마에게도 지금의 아들이란 존재는 먼저 떠난 아빠와 오빠에 대한 그리움을 채워 주는 따뜻함이었을까?

무시당하고 짓 밟히고 싸워서 마음에 생체기가 남아도 이 딱지쯤이야 하고 얼마든지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존재.

기억들이 소환되어 엄마를 원망하던 때도 여러 번이었지만 이젠 원망이 아니라 엄마도 엄마의 역할에 그게 최선이었음을 깨달았다. 할머니와 엄마의 다른 점이라면 점잖았던 할아버지와는 달리 불쑥 불쑥 튀어나오던 아빠의 화가 집안의 세간살이가 또 뒤집어질까 늘 노심초사했을 것이고 아이 다섯이 번갈아가며 아프거나 사고를 치는 데다 걸핏하면 직장을 그만두는 남편 때문에 오빠의 암 치료비와 일곱 식구의 생활비를 감당하기에 삼십 대의 엄마는 자신의 삶도 없고 내일도 없는 그저 버거운 오늘만을 잘 버텨내는 걸로 사셨겠구나 싶다.

생각해보니 난 내 감정을 토로하고 위로받을 수 있는 남편이 있지만 엄마는 아들밖에 모르는 할머니에게조차도 외면당한 채 차마 위로받지 못했던 외로운 삶이었음을.


엄마가 다리에 화상을 입으셨다고 했다. 여행을 다녀와서 찾아가 본 엄마의 허벅지에 얼룩져있던 뜨거운 물에 덴 자국들은 죄책감을 불러일으킨다. 나 하나 챙기기도 버거운 하루살이라며 한 달에 두 번 만나는 것을 핑계로 엄마에게 전화도 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젠가부터 엄마의 강한 인상을 보고 있노라면 짜증부터 밀려왔다. 하지만 내가 살아온 삶대로 내 얼굴에 그대로 노출되는 거라 믿는 나는 엄마의 큰 눈망울과 고왔던 피부는 어쩌면 엄마가 의도치 않게 만들어진 세월의 흔적이 아니었을까. 나 하나를 지켜야지만 이 하루를 버틸 수 있다는 비장함이 나에게는 당신밖에 모르는 지극히 배타적인 엄마로 기억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난 유독 엄마에게 편파적인 시선을 가졌던 것 같다. 나도 자식을 키워 보니 알겠더라.

부모의 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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