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채색인 하루일지라도 다 의미는 있었다
누구나 행복을 꿈꾼다
나는 의식을 일단 놓아버린 후에 죽음을 맞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아무 자각도 없이 그냥 웃다가 혹은 잠든 사이에
이승을 하직하면 좋겠다
-본문 중에서
아흔 살의 잔은 계절을 통과하며 지낸
일 년 여의 일기를 썼다.
때론 짧게 때로는 길게 기록된 일기는 그날의 기분과 일상을 공유했고 소소한 에피소드를 통해 행복을 전했다. 평범함 속에서 기쁨을 찾는 것도 그랬고 아무런 조건 없이 내어주는 자연을 바라보며 작은 한 가지에도 많이 감사해했다. 미사를 드리고 축일을 기념했으며 손주들을 위해 빵을 만들었고 요리를 해서 친구들을 초대하고
와인잔을 들어 건배를 하고 싱거운 대화에도 깔깔거리며 웃는다. 그녀의 생각은 곧고 깊이가 있었으니 함께 하려는 이도 많았다.
물론 외딴 시골 농가에서 홀로 지냄으로써 미치는 불안함에 간혹 떨기도 했다. 잠든 사이에 덮치러 올 것 같은 보이지 않는 위협에 대한 두려움도 내비치며 도둑이 들까 봐 침실 문도 이중으로 잠그고 잔다.
조금이라도 우울한 감정상태가 되면 이대로 있을 수 없다며 집 밖으로 나가 더 자주 걸었으며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추구하려 애썼다. 주일이면 운전을 해 성당을 다녀오고 오솔길로 산책을 하다 별똥별을 기다리는 잔에게서는 속상함이나 고독함 따위는 엿볼 수 없었다.
지루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 쓰는 한 가지 상황에 대해 일기장 한 면을 꽉 채우듯 말이다.
물론 일부였고 이것도 금세 잊힐 만큼 잔이 십자말풀이를 하며 시간을 보낼 때는 같이 맞추는 재미가 쏠쏠했다. 간혹 시어머니를 공주라고 표현하며 시댁살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가늠하는 대목에서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시어머니라는 단어가 주는 불편함은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일부는 꼭 있구나 싶었다.
이웃집에 한 참이나 어린 남자가 이사 왔다며 인사를 하기로 온날 잔은 명줄이 얼마 안 남았어도 누군가의 마음에 든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라며 설렘을 안고 옅은 화장을 한다. 그러나 초대되어 온 남성은 전직 대령으로서 군대 얘기만 나열했을 땐 적잖이 실망감을 맛보았지만 그런대로 새로운 만남은 언제나 신비롭다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질베르트라는 친구 자체가 거대한 사진첩이다
아흔네 살의 질베르트의 안위를 걱정하고 그녀가 아플까 봐 늘 마음 쓰며 지냈다.
진국이라 표현하는 요즘 말로 찐 친구를 두고는 우리는 그 어떤 것에서든지 벗어날 수 있고 치유될 수 있다며 고마움을 드러내는 걸 보고는 소중한 사람은 한 명이면 족하다는 어느 책의 문구가 떠올라 공감했다.
즐거울 때나 힘들 때나 기꺼이 함께 해주었던 좋은 이웃이 있었고 귀찮은 내색 없이 누군가를 보살펴야 한다는 책임의 식 없이 친구처럼 지내려 했던 편안함 속에 스스로를 밝게 사는 노인네라 규정하며 지내는 하루하루였다.
책을 읽다 보니 일상을 부지런함과 유쾌함을 지니며 자연의 경이로움을 함께 나누던 곱디고운 타샤 튜더가 생각나게 했다.
세월이 갈수록 나는 아무것도 아닌 일로
걱정을 키우는 것 같다
-본문 중에서
남의 죽음은 필연적으로 우리 자신의 죽음을 생각하게 한다. 라며 친구의 장례식에 다녀온 잔은 죽음보다는 장례식에는 꽃과 노래가 있다며 슬픔을 전환시킨다.
시간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보냈다
내 나이쯤 되면 포기할 건 포기하고 받아들일 건
받아들여야 한다
-본문 중에서
책의 마지막 장을 덮으며 재미난 인생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라고 깨닫게 해주는 책이다.
화려함과 남에게 보여 주기 위한 겉치레식보다는 소박한 일상에서 나를 찾아가는 묘미를 발견하게 된다.
귀엽고 매력적인 할머니였다.
누구나 꿈꾸는 게 아닌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나는 언제나 흐르고 있는 시간이 별 쓸모없는 일들로 얌전히 채워지는 나날들이 좋았다.
그런 일들이 행위나 감정을 불러일으키고 우리를 차지해버린다.
나는 잠을 많이 잤다. 많은 것을 잊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르는 대로 보냈다.
-장 도르메송. [언젠가 아무것도 말하지 않고 떠나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