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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천재가 아닌데 어떡하지?

by 이다

내가 첫 번째로 가진 꿈은 의사였다.

딱히 의사가 되고 싶은 합리적인 이유는 없었다.

그냥 사람을 치료하는 일이 멋졌다.

무엇보다, 나라면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무려 유치원에 다닐 적부터 수능성적표를 받아 들 때까지 믿었다.

나는 천재니까.


수능성적표를 받고 나서야 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접었다.

하지만 내가 천재라는 믿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대학교에 입학해서는 펑펑 놀기만 했다.

공부를 늦게 시작해도 얼마든지 잘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나는 천재니까.


군대를 다녀와 슬슬 공부에 임했지만 밑천은 금세 드러났다.

전공수업은 어려웠고 성적은 늘 바닥이었다.

이때쯤 두 번째 꿈이 생겼다.

어떻게든 괜찮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

그런데 다행히도, 상대적으로 취업이 쉬운 시절이어서 어떻게든 꿈을 이뤘다.

나는 천재니까.


회사를 다닌 지 어느새 곧 14년이 된다.

이 분야에 적합한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 꼬박 14년이 걸렸다.

그리고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 꼬박 38년이 걸렸다.

스스로가 가진 열등함에 대한 자책으로부터 온 멍청한 착각이었으리라.


하지만 당연하게도, 이 사실이 가치 없는 삶을 살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비트겐슈타인의 말을 빌리자면,

과녁의 중심을 단지 드물게 맞혔다고 하더라도,

어쨌든 나는 어떠한 목표들을 향해서 끊임없이 쏘아댔기 때문이다.

세 번째 꿈은 작가다.


인간은 어리석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누가 그랬던가.

나는 내가 글에 있어서만큼은 천재인 줄 알았다.

바로 얼마 전까지는.


다행히, 이번에는 천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금방 깨달았다.

다행히, 천재가 아니라는 이유로 세 번째 꿈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

내가 몸 담은 분야에 지적인 겸손함과 성실함을 가지고서 하나씩 알아내고 있다.

그게 천재가 아닌 이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유일한 대안이니까.

그저 목표를 향해서 끊임없이 쏘아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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