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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May 17. 2021

관계에서 손해가 느껴질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별한 사정도 없이 상습적으로 돈을 빌리면서 갚지도 않는 친구가 있다면, 관계를 멀리 하길 주저하지 않을 거다. 그런 물질적 손해를 계속 감당할 필요는 없는 거니까.


오래 알고 지낸 지인의 결혼 소식을 들으면 나는 내가 받았던 결혼식 축의금리스트에서 그 사람의 이름을 찾아본다. 나는 계산적인 인간이고, 관계에서 손해를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3시간 거리에 있는 친구 집들이에 갈 때, '먼 거리를 가니까 손해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내가 보고 싶어서,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 위해 가는 거니까.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관계는 수많은 계산을 내포하고 있다. 단지 그 단어에서 느껴지는 부정적인 뉘앙스로 인해 이 사실을 인정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에 사람들마다 차이가 있을 뿐.


타인에게 보답을 기대하며 선물을 주는 행위는 당연히 계산적이다. 그렇다면 보답을 기대하지 않는다면 계산적이지 않은 걸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물질이든 마음이든 정말로 아무 보답이 돌아오지 않을 때에 관계에 회의감을 느끼지 않을 사람 자체가 거의 없을 것이며,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이미 그 관계의 어딘가에서 손해를 메꾸고 있는 사람일 거다. 아니면 자신이 손해보고 있음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후회하게 될 사람이거나.


만일 관계에서 손해를 보고 있다면, 물질적인 부분에서라면 차라리 낫다. 왜냐면 계산이 쉬우니까. 문제는 마음에서 손해를 볼 때다. 보이지 않는 마음은 계산도 어렵고 표현하기도 힘들다.


안타깝게도, 하지만 당연하게도, 손해를 많이 보는 사람일수록 관계에 있어 계산적이지 못하다. 또한 간혹 계산적인 생각에 미쳤을 때에도 그렇게 생각하는 자신에게, 또는 그러한 생각 자체에 죄책감 내지는 거부감을 느끼며 결과를 받아들일 중요한 순간에 계산을 마무리짓지 못하거나, 가까스로 손에 쥔 결과에 의구심을 느낀다. 그리고 그렇게 손해는 반복된다.


결국 모든 관계는 물질과 마음을 주고받는 행위의 표현으로 이루어지고, 또 영위된다. 그 속에서 이익만을 추구하는 행위는 분명 이기적인 행위겠지만, 손해를 보지 않으려는 행위는 자신을 지키려는 행위이다. 그런 손해들이 결국 관계 속에서 자신을 상처 입게 만들지도 모르니까. 그런 계산 끝에 손해를 입고 있다고 여겨질 때에, 관대함보다는 단호함을 보여주는 행위가 나쁘게 여겨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 계산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자연스러운 계산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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