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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Sep 25. 2021

[소설] 아무 감정이라도

  약속 장소인 카페에는 손님이 많지 않았다. 여덟 테이블 남짓한 공간에, 손님이 앉아 있는 테이블은 둘 뿐이어서 한산해 보였다.

  종업원에게 일행이 곧 올 거라 말하며 양해를 구한 뒤 비어 있는 테이블에 앉았다. 그녀는 약속시간에 정확히 맞춰 나타났다.

  “왔어? 잘 지냈어?"

  “아니. 요새 비참해지는 기분이 들어서 컨디션이 아주 별로야.”

  내가 말을 건네자 그녀는 가방을 빈 의자에 내려놓으며 부정적인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게 밝게 웃으며 말했다.

  “뭐가 비참한데?”

  “너도 알잖아. 나 어떻게 사는지.”

  3년의 연애 끝에 결혼을 준비 중이던 그녀와 나는 부모님의 반대를 이기지 못하고 결국 만남에 종지부를 찍었다. 나는 사랑할 자격이 없다 말했고, 그녀는 그런 나를 이해한다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에서 하염없이 흘러내리던 눈물은 아직도 기억에 선하다.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얼마 전 그녀에게서 걸려온 전화는, 그녀가 나와 헤어진 뒤 6개월 만에 결혼을 했다는 놀라운 내용이었는데, 더 놀라운 건 그렇게 3개월 뒤에는 이혼까지 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면서 그녀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너무나 힘든데 기댈 사람이 없다며 한 번만 만나줄 수 있겠냐고 물었고, 얘기와는 다르게 한 번이 아니라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만나게 되었다.

  "그래도 그런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어. 그 정도는 아니니까. 그건 그렇고 너는 어때? 지난번엔 일이 많아서 힘들어하더니 좀 괜찮아?"

  그렇게 그녀를 다시 만난 날부터 나는 계속 복잡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만나선 안 될 사람을 만나는 데서 오는 듯한 죄책감, 그녀가 겪었던 일들의 책임이 결국 나에게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오만한 추측으로부터 오는 미안함, 그리고 이렇게라도 다시 그녀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오는, 긍정적이지만 느껴선 안 될 것만 같은 감정들이 뒤섞여 있던 것이다.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응, 뭔데?"

  "왜 이혼한 거야?"

  "..."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돼."

  "처음부터, 성급한 선택이었어."

  그녀는 잠시 망설이며 뭔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냥, 왠지 결혼이 하고 싶었나 봐. 참 바보 같지?"

  내가 기억하는 한, 그녀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또한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결코 약한 사람도 아니었는데, 다시 만난 그녀는 분명 예전보다는 많이 약해진 것 같았다. 더 정확히는, 약해졌다는 사실을 숨기려 애쓰는 듯 보였다. 때로는 들떠 보이기도, 때로는 우울해하는 것 같기도 한 불안한 모습이었다.

  "너는 여자친구 안 만나? 주변에 좋은 사람 없어?"

  "없어. 있으면 소개 좀 시켜줘."

  왜 안 만났는지는 나도 정확히는 모른다. 다만 굳이 떠올려 보자면, 왠지 앞으로는 누구도 다시 사랑하면 안 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은 적은 있었다. 결국 누군가와 결혼하면, 그녀에게 너무나 미안할 것 같았기에. 그래서 그녀에게 연락이 왔을 때 복잡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다시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지만, 여전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혹시 나를 계속 만나는 이유가 따로 있어?"

  "뭐, 그냥. 딱히 할 일도 없으니까."

  복잡하기만 한 나의 감정을 감춘 채로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고 싶지는 않았다. 혹시 그런 어쭙잖은 변명 때문에 본심을 들킬까 두렵기도 했다. 이미 상처를 줬던 내게 그런 감정을 품을 자격 따위는 없을 테니까.

  "..."

  "너는 날 왜 만나는데?"

  "나도 그냥. 나 화장실 좀."

  그렇게 대답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 그녀는 어딘가 불편함을 느끼는 듯 보였다.

  "나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먼저 가 볼게."

  그런데 돌아온 그녀는 어딘지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어색한 미소를 띤 채 자리에 앉지도 않고 갑작스럽게 얘기를 꺼냈다.

  "벌써 간다고?"

  “아참, 그리고.”

  그녀는 가방을 챙겨들며 별 거 아니라는 듯 운을 뗐다.

  “나 이제 너 안 만나려고. 전화번호도 바꿀 거니까 걱정된다고 혹시라도 연락하지는 마. 그동안 다시 만나줘서 정말 고마웠어.”

  “뭐라고?”

  "아까 말했잖아. 비참해진다고...”

  그리고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너는 내가 비참해져도 아무 감정이 없잖아."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얼른 생각이 안 나 멍청하게 입만 벌린 채 쳐다보고 있으려니 그녀가 여전히 미소를 띤 채 또 한 마디 했다.

  “안녕. 행복해야 해.”

  서둘러 카페를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다가, 뒤늦게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보았지만 그녀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나는 다시 자리로 돌아가 한참을 멍하니 앉아 있다가 카페가 문을 닫을 시간이 다 되어서야 집으로 향했다.

  그러니까 그게 벌써 3년 전 일이다. 그녀의 바람대로 이후로는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했고, 나는 그녀를 하루라도 빨리 기억 속에서 지우기 위해 이전보다 더 바쁘게 살아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에 대한 감정은 그날의 카페에서의 기억만큼이나 내게서 사라지지 않았고, 아직도 이따금씩 그녀를 떠올릴 때면, 마음 한 구석이 몹시 아려올 때가 있다.

  조금이라도 진심을 담아 말했다면, 어떤 변명이라도 했다면, 그렇게 용기를 낼 수 있었다면,

  아무 감정 없지 않느냐는 너의 말에 아무 감정이든 보여줬을 텐데.

  그때의 내가 아직까지도 원망스러울 줄 알았다면, 분명 그랬을 텐데.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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