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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Jan 07. 2022

마음은 어디에 존재할까

오감으로 확인 가능한 물질이든, 가슴으로 느껴지는 관념이든 마찬가지다. 타인에게 자신의 것을 건네려면 먼저 자신의 것이 존재해야 한다. 예컨대 선물을 주려면 선물이 존재해야 하고, 마음을 주려면 마음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물질과 달리 관념적인 것들은 그 크기나 양을 수치화할 수 없고, 따라서 확인할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그저 자신에게 떠오른 것들이 존재를 증명할 수 있으리라 믿고 건넬 뿐이다.


때로 마음은 활활 타오르는 불길처럼 선명하게 다가와 타고 남은 잿더미 위에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스러지곤 한다. 언제 어디서 발생하고 소멸했는지 타인은 물론 당사자조차 그것을 가늠하기 어렵다. 존재를 확인하기도 쉽지 않고, 확인하기 위해 손을 뻗는 순간 사라지기도 한다. 마음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래서 마음은 본연의 의미를 잃는 경우를 종종 마주한다. 건네주는 사람과 건네받는 사람의 인식에 차이가 있기에 발생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차이가 갈등으로 이어지면 답답하고 안타까운 상황이 연출되는데, 누구의 인식이 실제와 더 가까운지, 실제라는 것을 가늠할 수는 있는지 답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개 이러한 갈등의 해결에 내세울 수 있는 증거란 빈약하기 짝이 없다. 그러므로 확실한 증거가 아닌 막연한 느낌으로 해결에 다다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음이 갖는 강점이자 약점이 여실히 드러난다. 때로는 그 느낌이 마음과 마음을 그 무엇보다 굳건하게 연결하기도, 반대로 한 순간에 풀어헤치기도 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렇게 증명하기 어렵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한다. 그 증거가 확실치 않음에도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 어쩌면 그따위 증거쯤은 필요치 않을 정도로 확실하게 존재한다고 느꼈던 순간이 모두에게 있었기에 굳이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절로 이해되는 것이 바로 마음인 것은 아닐까?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까닭은, 마음의 존재를 증명했기 때문이 아니다. 그저 순간의 기억들 속에 떠오르던 느낌을 통해 그 존재를 굳게 믿고 있기 때문이다.


언젠가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안부전화를 걸던 목소리 끝에 떨리듯 전해 오던 마음을 들었다. 웃고 떠들며 부딪히는 쓰디쓴 술잔에 담긴 마음을 삼켰다. 하염없이 내리는 눈을 맞으며 수줍게 잡던 손 끝으로 마음을 만졌다. 이제는 다시 만날 수 없는 어머니의 옷장 속에서 마음을 맡았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던 그 깊은 눈동자 속에 비친 마음을 보았다. 숱하고 숱한 순간들 속에서 그 누구도 마음의 존재를 부인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마음은 어떤 감각으로도 느낄 수 없지만, 모든 감각으로 찾아온다.


그렇게 마음은 붙잡을 수 없지만, 주고받을 수 있다.


그래서 마음은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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