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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Apr 12. 2022

생에 가장 힘들었던 나날의 기억

누군가 내게 생에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꼽아 보라고 한다면, 나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중학교 3학년 시절을 꼽을 것이다.


그 시절의 나는 이른바 은따였다. 친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극소수였고, 그렇다고 그 친구들과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친한 것도 아니었다. 학급에는 소위 일진 내지는 양아치들이 몇몇 있어 나는 그들의 괴롭힘에 시달렸다. 소심하고, 키도 작은 편이었고, 힘도 약했던 나는 그 괴롭힘을 그저 참고 견디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쉬는 시간, 책상에 엎드려 있는데 주먹으로 나를 한참 때리고 지나간 적도 있었다. 빼앗기다시피 빌려준 배드민턴 라켓의 망이 끊어져 있어 이에 대해 묻자 다짜고짜 욕을 하기에 무서워져서 아무 말도 못 했던 적도 있었다. 점심시간에 뒤에서 날아오는 반찬에 맞기도 했고, 체육시간에 운동장을 뛰고 있으면 다리를 걸어 넘어지기도 했다. 그 외에도 괴롭힘을 당했던 기억은 수없이 많다.


인생에서 자살이라는 행위에 대해 조금이라도 고민했던 적은 그때가 유일하다. 그래도 지금만큼은 아니지만, 그 당시에도 제법 낙천적인 성격이어서 언젠가 시간이 가겠지 하며 계속 참고 버텼다. 다행히 중학교를 졸업하는 시기였기에 더 잘 버틸 수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로 진학하면서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는 떨어지게 되어 안도할 수 있었지만, 고민은 남아 있었다. 따돌림이 또 반복되면 어쩌지? 하는 걱정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따돌림은 잘못된 행위다. 누군가를 싫어한다고 해서 따돌림이라는 방식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와 별개로, 나를 싫어하는 이유에 대해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유가 없다면 똥 밟은 양 운이 없었다고 치부하고 넘어가면 그만이지만, 조금이라도 이유가 있다면 좋지 않은 형태로 반복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느 날, 나는 따돌림의 원인이 내게 있지는 않았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숨겨왔던 진실을 고백하자면, 중학교 3학년 시절의 나는 인격적으로 미성숙했던 아이였다. 공부를 그렇게 잘하는 편도 아니었으면서 여러 가지 상식들에 대해 야단스레 떠벌리며 소위 아는 체를 하기도 했다. 가끔은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듣고 혼자 급발진을 하기도 했고, 친구들끼리의 대화를 이상한 방식으로 끊기도 했다. 평범함을 거부한다고 말하면서 평범한 무리에 소속되려 애를 썼다. 물론 그 나이대의 아이들에게 대개 미성숙한 부분이 있겠지만, 나는 관심을 갈구하기도 했기에 그런 미성숙한 부분들이 더 눈에 잘 띄었다.


다행히 당시의 나는 나름대로 필사적이었기에, 자기객관화를 제법 열심히 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에서는 그런 행동을 줄여보려 노력했고, 말과 행동으로 표현하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해보게 되었다. 친구들은 나를 조용하고 성실한 아이 정도로 생각했고, 졸업할 때까지 제법 원만한 학창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거듭 말하지만 따돌림과 괴롭힘은 분명 잘못된 행위다. 하지만 그 사실이 내가 머물러 있어도 된다는 사실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렇게 머물러 있지 않았던 나를 대견하게 여긴다.


힘들었던 시기의 마음과 감정들은 지금 생각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그렇게 끔찍한 기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더 노력할 수 있었고, 자신을 더 잘 돌아볼 수 있었던 건 사실이다. 그 시기에 겪었던 일들이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그 일들이 바로 긍정적인 변화의 출발점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때의 나날은 나의 자서전에 많은 공간을 할애하게 될, 손때가 묻도록 펼쳐볼 페이지이다. 그리고 그 페이지에는 시련을 마주할 때마다 돌아볼 수 있도록 언제까지나 책갈피가 꽂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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