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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Aug 18. 2022

두려움과 마취

어렸을 때의 경험 중 유달리 기억에 남아 있는 일이 하나 있다. 한참 이갈이를 하던 때였는데 언제부턴가 어금니 바로 아래로 뭔가 딱딱한 게 삐져나와 있다는 게 느껴졌다.


치과에 갔더니 의사는 덧니가 올라오고 있어 흔들리지도 않는 멀쩡한 생니를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어린 나이에도 치과를 자주 다녔던 나는 마취라는 괜찮은 수단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서워져 마취주사를 놓아줄  없겠는지 물었다.


"놓을 수는 있는데, 마취주사가 이를 뽑는 것보다 더 아플 걸? 이 뽑는 거 생각보다 별로 안 아파. 그래도 마취주사를 놓는 게 낫겠어?"


아무리 그래도 생니를 뽑는 통증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았기에, 겁이 났던 나는 통증을 이미 겪어 본 마취주사를 택했다. 의사의 말대로 마취주사 역시 아팠지만, 그래도 이를 뽑는 것보다는 나았으리라 합리화하며 만족했다.


겪어 보지 못 한 통증이 두려워 그 대신 이미 경험한 바 있는 통증을 택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손절이나 이별이 아플까 겁이 나 앞으로도 나아질 것 같지 않은 관계를 무의미하게 유지하며 계속 괴로워한다든지.


하지만 두려움이 무지로부터 온다고 한다면, 어쩌면 경험해 보지 않은 두려움은 영영 곁에 머물지 모른다. 그래서 통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절실하게 필요할 때가 분명 있다.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마취주사를 택할 것 같다. 두려운 건 두려운 거니까. 물론 그렇기에 나는, 언제까지나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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