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의 경험 중 유달리 기억에 남아 있는 일이 하나 있다. 한참 이갈이를 하던 때였는데 언제부턴가 어금니 바로 아래로 뭔가 딱딱한 게 삐져나와 있다는 게 느껴졌다.
치과에 갔더니 의사는 덧니가 올라오고 있어 흔들리지도 않는 멀쩡한 생니를 뽑아야 한다고 말했다. 어린 나이에도 치과를 자주 다녔던 나는 마취라는 괜찮은 수단이 있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서워져 마취주사를 놓아줄 수 없겠는지 물었다.
"놓을 수는 있는데, 마취주사가 이를 뽑는 것보다 더 아플 걸? 이 뽑는 거 생각보다 별로 안 아파. 그래도 마취주사를 놓는 게 낫겠어?"
아무리 그래도 생니를 뽑는 통증이 어느 정도인지 상상이 잘 가지 않았기에, 겁이 났던 나는 통증을 이미 겪어 본 마취주사를 택했다. 의사의 말대로 마취주사 역시 아팠지만, 그래도 이를 뽑는 것보다는 나았으리라 합리화하며 만족했다.
겪어 보지 못 한 통증이 두려워 그 대신 이미 경험한 바 있는 통증을 택할 때가 있다. 이를테면 손절이나 이별이 아플까 겁이 나 앞으로도 나아질 것 같지 않은 관계를 무의미하게 유지하며 계속 괴로워한다든지.
하지만 두려움이 무지로부터 온다고 한다면, 어쩌면 경험해 보지 않은 두려움은 영영 곁에 머물지 모른다. 그래서 통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가 절실하게 필요할 때가 분명 있다.
이렇게 말했지만, 사실 과거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마취주사를 택할 것 같다. 두려운 건 두려운 거니까. 물론 그렇기에 나는, 언제까지나 그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