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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Sep 29. 2022

상대평가와 절대평가를 통한 자기객관화

내 생각에 바람직한 자기객관화는 두 가지의 평가방식을 통한 반복적 자기인식 속에서 이루어진다. 하나는 타인을 기준으로 하는 상대평가요, 다른 하나는 기준이 필요치 않은 절대평가다.


자아를 구성하는 요소에는 비교를 통해 더 객관적인 의미를 가지는 것들이 많다. 이를테면 소극적이거나, 겁이 없다거나, 자존감이 높다거나 하는, 상대적인 개념으로 접근해야 하는 특징이 많다는 뜻이다.


만일 갑자기 세상이 나보다 게으른 사람들로만 가득 차게 된다면,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도 단숨에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사람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일련의 특징들 앞에는 ‘평균적인 차원에서’ 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자신에 대한 인식에 타인을 기준으로 하는 상대평가가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 준다. 상대평가가 완전히 배제된 자기인식은 아마 자기객관화보다, 강한 자기확신 아래에서 이루어지는 자기합리화에 더 가까울 것이다.


그렇지만 상대평가에 지나치게 얽매이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그럴 때 자아는 마치 뿌리가 얕은 나무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기 쉽다. 비교대상에 따라 자신에 대한 인식 역시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의 정확한 모습을 확신하기 어렵다.


그래서 언젠가는 자아에 대한 일정 수준 이상의 확신이 필요해질 때가 찾아온다. 그런 확신이 없다면 자아는 확립되었다고 보기 어렵다. 확신 없는 자아는 언제든지 타인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 있는 거짓된 자아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절대평가가 요구된다. 지금까지 '타인에 비해 어떤지' 에 중점을 뒀다면, 이제부터는 '누구와 비교하든지 상관없이' 에 중점을 두고 자신에 대해 인식하고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이렇게 굳이 타인과 비교하지 않아도 자신에 대해 절대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때, 결국 그만큼 자아는 단단하게 자리 잡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의 글로 보면 얼핏 절대평가가 더 나은 방식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절대평가에만 매달리고 상대평가에 별 신경을 쓰지 않게 된다면, 자아를 잘못 인지했을 때 그것을 알아채기 어려운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게다가 한 가지 무서운 점은, 여기에 속하는 사람일수록 맹목적인 자기확신을 가질 확률이 높다는 거다. 그리하여 갈수록 자신에 대한 오판을 강하게 믿고, 그럴수록 상대평가에는 소홀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하곤 한다.


그래서 자기확신을 통해 자아에 대한 탄탄한 기반을 다진 후에는, 다시 상대평가로 눈을 돌려 두 가지 평가방식을 반복하여 활용하면 좋다.


또한 둘 사이의 경계는 디지털보다 아날로그에 가깝기에, 그 반복은 부분적으로는 치우칠 수 있더라도 전체적으로는 유연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현실 속에서 누구든 두 가지 평가방식 중 어느 하나에 조금씩은 더 중점을 두고 있게 마련이다. 그런데 나에 대한 나의 평가와 타인의 평가가 일치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며, 그 갭이 크다면 자기객관화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지 한 번쯤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럴 때에는 중점을 두던 방향과는 다른 방향에서 자신을 인식해보는 것도 분명 괜찮은 방법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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