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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다 Jun 30. 2023

‘죽고 싶다’ 는 표현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지 엄청나게 오래되었다. 언제였는지 기억도 잘 안 날 정도다. 지금의 나는 죽고 싶다는 생각은 물론이고, 지나가는 말로라도 죽고 싶다고 표현하지 않는다. 가까운 이가 이런 표현을 사용할 때면, 왜 굳이 그렇게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해야 하는지, 듣는 이로 하여금 극단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에 목적이 있는 것인지 하는 여러 생각들의 끝에 ‘그건 좋지 않은 표현이야.’ 라고 말하고 싶어 진다.


이는 내가 지나치게 낙관적인 성격이기 때문인 이유도 크지만,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행위에 대한 강박적인 시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 이유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그러니까 안 좋게 말하자면, 나는 이 행위를, 또는 이 행위를 조금이라도 떠올리는 이를 이해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떨까? 아마 행위의 정당성에 대해서는 나의 태도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행위를 떠올려보기만 하는 하는 이에 대한 태도는 옳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까? 죽고 싶다고 내뱉는 이의 마음이란 어떤 걸까?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누군가의 입장이 되어 보려 노력할 필요가 있다. 그리하여 이해심이 깊은 이는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입장에 처한 이의 마음조차도 어렴풋이나마 헤아릴 수 있다. 비록 그 이해의 방향이 결과적으로는 옳지 않을지라도, 예컨대 무차별 연쇄살인범의 마음을 이해해 보려는 일견 무의미한 시도와 같을지라도, 별개로 그 시도 자체는 결코 무의미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나의 태도는 그런 입장이 되어 보려는 시도 자체를 거부한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분히 딱딱하고 폐쇄적이기에, 서로 간의 이해와 소통의 기회를 막고 있는 벽으로 작용한다.


그래서 누군가 왜 죽고 싶어 할까? 혹은 당사자를 나로 치환하여 나라도 그런 상황이라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까? 하는 문제를 이해하려면, 우선 태도를 바꿔야 한다. 오죽하면 죽고 싶다는 표현을 쓸까? 와 같은 질문 내지는 생각이 필요하다. 당장 쉽게 이해가 가지는 않더라도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려보는 행위가 선행되어야 한다.


물론 이렇게 말하고 있으면서도, 나로 말할 것 같으면, 평생토록 죽고 싶다는 생각을 떠올릴 일은 없을 것 같다. 하지만 이 예상이 비록 사실이 된다 하더라도, 그 사실이 죽고 싶어 하는 이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는 의미를 나타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이해를 위한 시도의 끝에 다다른 뒤에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건 역시 좋지 않은 표현이야.‘ 라고 언젠가 당당하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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