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상급자가 요청한 업무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받아들이는 팀장 밑에서 일했던 적이 있다. 적어도 팀장이라면, 그게 꼭 필요한 업무인지, 그 방법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지 정도는 고민해봐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는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 그저 윗사람에게든 아랫사람에게든 싫은 소리를 못하던 착한 상사일 뿐이었다.
팀원들의 불만이 쌓여가던 어느 날, 팀장이 여느 때처럼 비효율적인 업무요청을 상급자로부터 그대로 받아 들고 와서 팀원들에게 전달했다. 팀원들은 또 시작이라는 표정이었고, 팀에서 차선임자 정도의 위치에 있던 나는 짧은 고민 끝에 이걸 왜 이렇게 처리해야 하는지 이해가 안 간다고, 팀장님이 조정을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한마디 했다. 그는 나를 설득하려 했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고 요목조목 따져가며 반박했다. 그런데 몇 번의 대화 내지는 논쟁이 오가다가, 그가 얼굴에 애써 웃음기를 띠며 부탁하듯 말했다.
“윗사람이 시키는 건데, 그냥 좀 하면 안 되겠냐?”
나의 의견이 타당하지 않게 들렸을 수도 있고, 나의 표현이 그의 감정을 상하게 했을 수도 있다. 그 사실을 팀장이 언급했다면 나도 몇 발자국 양보했을 것이다. 하지만 저 내용은 그런 것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말이 아닌가? 아무런 논리도 설득력도 없는 요청에 어이가 없어 나도 모르게 입을 떡 벌렸던 기억이 아직도 난다. 그의 부드러운 표정과 말투에도 나는 기분이 매우 나빴다. 그리고 어쨌든 더 이상의 대화를 중단하고 마지못해 그의 요청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유 없이 그냥 하라는데 받아들이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저런 구시대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싫어하다 못해 경멸한다. 최소한 "그래도 윗사람이 시키는 거니까 일단 처리한 다음 합리적인 대안을 찾아보자." 와 같이 말할 수는 없었던 걸까? 그때의 회사생활은 참 힘들었다. 힘들어서 힘들었다기보다, 힘든데도 개선하려 하지 않아서 힘들었다. 아마 납득이 되었다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 같다. 적어도 납득시키려는 최소한의 시도가 있었다면 이렇게 기억에 남지는 않았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