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의 일이다. 대학교를 다니던 나는 그날 저녁에도 언제나처럼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창 마시던 중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받아보니 경찰이란다.
조사할 게 있으니 가능하면 지금 경찰서로 와달란다.
참고로 이런 단순 참고인 조사요청의 경우 안 가도 된다.
물론 자신이 정말 중요한 참고인인데도 계속 요청에 불응하면 강제로 소환된다.
당시의 나는 이런 걸 잘 몰랐기에 안 가면 큰일 나는 줄 알고 술 마시다 말고 얼른 일어나 경찰서로 향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웃긴데, 술 마셔서 얼굴 빨개진 채로 걸어서 부득부득 갔다. 10분쯤 거리였다.
가니까 형사인듯한 아저씨가 앉아보란다. 앉았다. 모니터를 보여준다. 당시 유행하던 싸O월드의 내 미니홈피였다.
거기 있는 나의 모습 사진 몇 개를 보여주더니 본인이 맞냐고 묻는다. 맞다고 했다.
그다음에는 어떤 CCTV화면을 보여준다. 흐릿한 화면 안에 누군가 서 있었다. 누구인지 알겠냐고 묻는다.
나랑 비슷한 옷차림에 비슷한 가방을 메고 있었다. 멍청하게도 나랑 비슷하게 생긴 것 같다고 그랬다.
그러자 그 형사가 나를 가리키며, 이게 니가(반말을 했다.) 다니는 학교에서 일어난 도난사건 용의자의 모습이란다.
뭐 할 말 없느냐고 또 묻는다.
...???
나는 우리 학교에서 도난사건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방금 처음 들었다. 당황스러웠다.
상황파악이 끝난 뒤 나는 범인이 아니라고 말했다. 추리소설이나 드라마 같은 데서나 보던 대사를 치고 있는 지금 상황이 웃기기도 황당하기도 했다.
어느새 여럿으로 늘어난 형사들은 진짜 아니냐고 되묻기도 하고 다른 몇 가지 정보를 묻기도 했다. 무슨 질문을 했는지 정확한 기억은 안 난다. 다만 모두 내가 모르는 이야기였던 것만 기억난다. 그래서 모른다고만 대답했던 것 같다.
얼마간의 정적이 흐른 후 나를 보던 맨 처음의 그 형사가 말했다.
조사하면 다 나온단다. 시치미 떼지 말고 그만 자수하란다.
......??????
나는 추리물을 좋아한다. 이것도 어디서 많이 접하던 친숙한 대사다.
이 대목에서 화를 냈던 것 같다. 아저씨가 뭔데 사람을 함부로 범인 취급하냐고. 나는 진짜 아니라고. 증거가 있으면 갖고 와 보라고.
마지막 말을 하면서는 약간 희열을 느꼈던 것도 같다.
아마 지금 같으면 형사의 직급과 이름을 알아낸 다음 민원(민원이 맞나?)을 넣었을 거다. 더 희열을 느낄 수 있었을 거다.
형사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여전히 범인을 노려보는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정 그러면 유전자 대조를 하겠다면서 내 입안의 상피세포를 떼어갔다. 그리고 나서야 나를 보내줬다.
경찰서 건물이 참 지저분해 보였다. 어둑한 밤공기는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다. 그 후로는 경찰서로부터 연락을 받은 적이 없다.
실제 범인이 잡혔는지 안 잡혔는지는 모르겠다. 아마 싸O월드를 털어 범인을 찾아내던 우수한 수사방법으로 틀림없이 범인을 잡았을 거라 믿는다. 물론 진범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