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한 사람이 편안함을 느낀다는 건
그만큼 다른 사람이 불편함을 짊어지고 있다는 뜻이다.
나는 요즘 무척 편안하다.
10개월째 백수에
부모님 집에서 지내고 있다.
집값을 내지 않고, 식비도 내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한 달에 쓰는 지출도 적은 편이다.
우리 엄마는 늘 바쁘다.
육 남매의 엄마라 그런지 결혼한 딸네 집 반찬도
신경 쓰고, 윗집 사는 작은 이모 반찬도 챙겨주고,
우리 집 밥도 엄마가 다 한다.
엄마는 늘 투덜거린다.
얼른 죽어야지
오래 살아서 뭐하나
내가 죽어야지
이런 말을 자주 한다.
음식을 하면서도 어깨가 아프니 몸이 천근만근이니 한다.
그러면서도 엄마는 딸의 부탁이나
이모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다.
그러면 또 반복이다.
음식을 하고, 세상 불행한 사람인 듯하는 것이다.
나는 그 모습이 이해가 안 된다.
내가 해외에 있었을 때 피부염이 심했는데
그럼에도 나는 해외에 남기를 바랐다.
그러나 엄마는 기어코 한국으로 들어오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울면서 한국에 가기 싫다고 했을 때, 일단 들어오라고 한 게 엄마다.
아마 타지에서 면역력이 떨어져 힘들어하는 딸의 모습을 보기 힘들었으리라.
어쨌든 반강요에 의해 한국행을 선택했을 때,
상황은 좋아졌을지 모르나
마음속에 엄마에 대한 원망의 꽃이 피었다.
내 마음이 담긴 선택이 아니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게 한국에 온 지 7개월째인 지금.
엄마는 내가 집에서 나갔으면 하는 눈치다.
그도 그럴 것이 집에서 거의 뭔가를 안 했다.
의도치 않은 상황 속 무기력에 허우적 되다가
힘들다면서 다른 사람들 음식 해주는 엄마의 모습이
탐탁지 않았다.
닭볶음탕을 말하면 거기에 뼈해장국까지 추가로 해주는 게 엄마다.
그러면 당연하게도 힘드니 나에게 부탁을 한다.
한 두 가지 정도 하다가 그냥 사 먹지 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힘들어서 병원도 다니는데 왜 굳이 고생을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다.
나는 어른이 되려면 한참이나 멀었는가 보다.
언젠가 우리 엄마 같은 상황을 다른 사람의 사연 속에서도 본 적이 있는데, 엄마는 원래 그런 존재인 건가 싶다.
사실 어느 때보다 편안하게 잘 살아서 만족스러운
인생이라 느끼고 있었는데, 엄마는 아닌 듯하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엄마가 다음 내 선택에는 굳이 집으로 불러들이지 않을 것 같으니.
아직 나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사는 게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