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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May 14. 2024

[장자5] 제물론(2) - 모든 현상의 참주인(眞宰)

관점 바꾸기를 자유자재로 하는 평화

[장자5] 제물론2  - 모든 현상의 참주인(眞宰) / 관점 바꾸기를 자유자재로 하는 평화




지적(知的) 활동과 감정의 작용


4. 큰 꾀는 느긋하고,

작은 꾀는 좀스럽고.


큰 말은 담박하고,

작은 말은 시끄럽고.


잠잘 때는 꿈으로 뒤숭숭하고,

깨어 있을 때는 감각 기관이 일을 시작하고.


접촉하는 일마다 말썽을 일으키고,

마음은 날마다 싸움질에나 쓰고.


더러는 우물쭈물

더러는 음흉

더러는 좀생이


작은 두려움에는 기죽어하고,

큰 두려움에는 기절하고.


시비를 가릴 때는, 물매나 화살이 날아가듯 날쌔다. 끝내 이기겠다는 것을 보면, 하늘에 두고 한 맹세 지키듯 끈덕지다. 날로 쇠하는 것 보면, 가을 · 겨울에 풀과 나무가 말라 가는 것과 같고 하는 일에 빠져들면 헤어날 길이 없다. 늙어서 욕심이 지나친 것 보면, 근심에 눌려 꼭 막힌 것 같다. 죽음에 가까워진 그 마음은 다시 소생시킬 수가 없다.



5.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 염려와 후회, 변덕과 고집, 아첨과 방자, 터놓음과 꾸밈. 이것들이 모두 빈 데서 나오는 노래요, 습한 데서 나오는 버섯이다. 우리 안에 밤낮으로 번갈아 나타나지만,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가 없지. 이렇게 아침저녁으로 [여러 가지 마음의 변화가] 나타나기에 우리가 삶을 유지하는 것. 이런 것들이 없으면 내가 있을 수 없고, 내가 없으면 이런 것들이 나타날 턱이 없지. 이야말로 진실에 가까운 것이나 이런 변화가 나타나게 하는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구나.



참주인(眞宰)


6. [이런 변화를 주관하는] 참주인(眞宰)이 분명히 있는데, 그 흔적을 잡을 수 없구나. 참주인이 작용하는 것은 믿을 만한데,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셈이지. 실체가 있지만 모양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몸에는 뼈마디가 백, 구멍이 아홉, 여섯 가지 내장이 있는데, 그 중에서 어떤 것을 특별히 더 좋아해야 하는 걸까? 자네는 모든 것을 다 좋아하나? 그 중에서 어느 것을 특히 더 좋아하는 것 아닌가? 그러면 [그 좋아하는 것만 떠받들고] 다른 것은 모두 머슴이나 종처럼 취급하나? 머슴이나 종들은 자신들을 스스로 다스릴 수 없는 것인가? 서로 임금과 신하의 입장을 번갈아 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들 속에 참임금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가 그 실체를 알든 모르든 그 참모습에는 보탤 것도 뺄 것도 없다.



7. 일단 온전한 몸을 받았으면, 우리는 그것을 일부러 망치지 말고, 저절로 쇠잔해질 때까지 기다린다. 사물을 대하여 서로 깎고 가는 동안에 우리의 삶은 달리는 말처럼 걷잡을 수 없이 지나가고 마니, 이 또한 슬픈 일이 아니니? 죽을 때까지 일하고 수고해도 아무것도 잘된 것 보지 못하고, 그저 일에 쫓기고 지쳐 돌아가 쉴 데도 없으니, 이 어찌 애처롭지 않으니? 그래도 죽지는 않았다고 자위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렇게 살아 있다는 것] 뭐 그리 대수니? 어차피 몸도 쇠하고 마음도 그렇게 되고 마니 정말 애처롭기 그지없는 일 아니겠느니?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본래 이처럼 엉망진창인 것인가? 오직 나만 이런 것인가? 사람들 중에 이렇게 엉망진창이 아닌 이들도 있다는 것일까?


- 오강남 교수 번역의 장자 본문 내용에서 발췌




필자가 30년쯤 전 젊은 시절에 몸 담았던 수련 단체가 있었다. 그곳에서는 ‘내 몸은 내가 아니라 내 것이다’ 라는 인식과 신념을 주입시켰다. 한편으로 보면 잘못된 말이 아닐 수도 있지만 이것은 굉장히 큰 소유 의식을 키우게 된다. 내 몸이 나의 소유물이라면 내 뜻대로 되어야 하고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텐데 당장은 내 뜻대로 안되기도 하고 결국 나중에는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그곳에서 나중에는 ‘내 마음도 내 것이다’ 라는 식으로 인식시켰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 보면 그렇다. 몸과 마음이 정말로 ‘내 것’ 인가? 글쎄. 몸은 ‘나라고 여겨지는 존재의 생명’을 받아 물질적 구성 요소들이 잠시 모였다가 언젠가는 흩어지게 되는 것일 뿐이다. 마음도 역시 마찬가지로 정신적 구성 요소들이 모였다가 흩어져서 사라진다. 모든 현상들이 그렇다 - 이것을 붓다의 가르침에서는 무상(無常)이라 한다.


흔히 무상이라 하면 아! 인생이 무상하구나! 하면서 외롭고 쓸쓸한 감정을 일으키는데 그것은 사실과 거리가 멀다. 무상은 항상 그대로인 것 (상常, 항상)이 없다(無)는 현상적인 진리를 드러내는 말이다. 감정에 휩쓸리지 말고 이런 현상과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잘 보면 그것이 지혜인 것이다.


이 장에서 장자는 온갖 현실적인 현상들, 마음의 현상들에 대해 그야말로 시니컬한 관점에서 기술하고 있다. 한편으론 들쑥날쑥 하고 어지럽고 복잡한 그 모든 잡다한 현상의 이면에 참주인(眞宰)이 있다고 이야기한다. 이 참주인은 실체가 있지만 모양을 알 수 없다. 바로 앞 장에서 장자는 자기 선생의 말을 통해 제자에게 ‘하늘의 퉁소 소리’ 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핵심적인 내용은 되묻는다. ‘그 소리가 나게 하는 건 누구겠느냐?’ 라고. 사실 답은 이미 나와 있다. 모든 현상의 이면에 있는 참주인(眞宰) 이다.


필자가 <비움과 치유의 근원 에너지> 책에서 기술하였듯이 모든 드러나는 현상들 이면에서 참으로 작용하는 ‘무엇’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이 글의 뒤에서도 여러번 반복되겠지만 언어를 초월한 것이기 때문에 긴 인류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이름 붙이다 보니 같은 것의 다른 이름들로 불려졌다. 도(道), 신(神), 하늘, 불성(佛性), 신성(神性), 하느님, 하나님, 하나(THE ONE) 등의 여러 이름들이 있고 여기서 장자는 참주인(眞宰)이라 하였다.


마지막으로 다음의 장자 본문을 보자.



‘굳은 마음(成心)’ [여기서 成心은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다 - 역자 주]


8. 우리에게 생긴 ‘굳은 마음(成心)’을 따라 그것을 스승으로 떠받들면, 스승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니? 그렇게 되면 어찌 변화의 이치를 아는 현명한 사람들만이겠느냐, 우둔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지. 아직 이런 굳은 마음이 없는데도 옳고 그름을 따지려는 것은 마치 오늘 월(越)나라를 향해 떠나 어제 그곳에 도착했다는 것과 같이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수 있다고 억지를 부리는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을 있을 수 있다고 하면 우(禹) 임금처럼 신령한 분이라도 알 수 없을 텐데 하물며 나 같은 사람이 어찌 이를 알 수 있겠느니?



여기서 굳은 마음(성심)이란 해석 여부에 따라 정반대의 뜻으로 나뉘게 되는데 일반적으로는 부정적인 해석에 가까운 것이 지배적이라고 한다. 즉 성심이란 굳어진 마음, 유연하지 못한 마음, 편견, 선입견,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을 스승으로 떠받든다는 것은 옳고 그름을 나누는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며 앞세운다는 뜻이다. 이 마음이 없다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 된다. 이후에 등장하는 본문에서 여러차례 반복되겠지만 장자는 이것과 저것, 상대적인 것들의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않는, 상대성을 초월한 절대성을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여긴다.


반대로 성심을 좋은 방향으로 보면 나머지 문장들은 또 그에 맞게 보이는데 이것이 한편으로는 심리학 책에 자주 등장하는 ‘미녀와 마귀할멈’ 의 그림을 떠올리게도 한다. 그림의 이쪽을 중심으로 보면 미녀의 옆 얼굴로, 반대로 저쪽을 중심으로 보면 마귀할멈처럼 보이는 그림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착시 그림 ‘나의 아내와 시어머니’. 위키미디어 코먼스


성심을 ‘어떤 일을 이루고자 하는 부동심’ 으로 보아 지키면 (스승으로 보면) 누구나 자기 내면에 자신의 스승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면 현명한 사람이든 우둔한 사람이든 스스로의 스승을 가지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러한 부동심이 없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그 자체로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이것이 위의 제물론 8편에 대해 성심을 긍정적인 해석으로 볼 수 있는 해석이 된다.


사실 세상사 많은 일들이 그렇지 않은가? 서로 반대편에 서서 각자의 신념이 옳다고 여기며 다투고 싸우다 못해 그 분을 이기지 못해 죽이고 전쟁을 일으키는 참사를 내고야 만다. 가운데 도(道, 중도?)의 입장에서 보아 이것도 저것도 다르지 않다고 누누이 강조하는 장자가 보기에는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일일 것이다. 어느 하나의 입장에 몰입하면 할수록 그것만이 옳은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멀리 떨어져서 보면 볼수록 - 점점 하늘 높이 오르다 못해 대기권 밖으로 나가서 지구를 작은 공, 작은 구슬, 작은 점처럼 멀어져 가면서 보게 하는 영상에서처럼 - 작은 지구별에서 아옹다옹 내가 옳네 니가 그르네 하는 모습은 참으로 안타깝기 짝이 없어 보인다. 사실상 그렇게 우주로 멀리 나갈 필요도 없을 것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 마음의 때(탐진치 - 욕심, 화, 어리석음)를 비우고 버리면 버릴수록 더욱 투명해진 마음은 어떤 일에 대해서든 걸림 없이 지나게 되지 않겠는가. 그것을 투명한 마음이라 부르든 큰 마음이나 큰 사람이라 부르든 결국은 같은 방향이 될 것이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여러분은 성심에 대한 어떤 쪽 해석이 마음에 드는가?

성심(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을 버릴 것인가, 성심(일을 이루고자 하는 부동심)을 가질 것인가?

성심이라는 단어를 어찌 해석하느냐에 따라 완전히 달라질 일 같다.

어찌 해석하는 것이 옳을지 자신의 주장을 일을 펴는 일(결국 옳고 그름을 따짐)은 학자들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앞의 성심(시비를 가림)을 버리고 뒤의 성심(부동심)을 취하면 그보다 좋을 순 없을 듯하다. 어차피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명상에 더 큰 뜻을 두든, 세상 일의 성취에 더 큰 뜻을 두든 성심(性心(부동심)과 誠心(정성))을 다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한 요소일 테니까 말이다.



- 明濟 전용석

한흐름 마음비움센터 I 한흐름 기명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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