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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제 전용석 May 19. 2024

[장자6] 제물론(3) 조삼모사(朝三暮四)

좌뇌를 멈추는 명상


[장자6] 제물론(3) 조삼모사(朝三暮四) / 좌뇌를 멈추는 명상



말을 한다는 것은


9. 말을 한다는 것은 그저 숨을 내쉬는 것만이 아니다. 말에는 뜻이 있지. 말을 했지만 말하려는 바가 뚜렷하지 않다면, 말을 했다고 해야 할까, 아직 하지 않았다고 해야 할까? 말은 새끼 새들이 재잘거리는 소리와 다르다고 하는데 정말 다른 것일까, 다르지 않은 것일까?


도(道)가 무엇에 가리어 참과 거짓의 분별이 생긴 것일까? 참 말은 무엇에 가리어 옳고 그름의 차이가 생긴 것일까? 도가 어디로 사라지고 없어진 걸까? 참말이 어디에 있기에 제구실을 못 하는가? 도는 자질구레한 이룸에 가리고, 참말은 현란한 말장난에 가리었다. 그리하여 유가(儒家)와 묵가(墨家)가 시비를 다투어, 한 쪽에서 옳다 하면 다른 쪽에서 그르다 하고, 한쪽에서 그르다 하면 다른 쪽에서 옳다 하는 것이다. 이들이 그르다 하는 것을 옳다 하고, 이들이 옳다 하는 것을 그르다 하려면, 무엇보다도 [이들의 옳고 그름을 초월하여 모든 것을 꿰뚫어 볼 수 있는] 밝음(明)이 있어야 한다.



‘이것’과 ‘저것’


10. 사물은 모두 ‘저것’ 아닌 것이 없고, 동시에 모두 ‘이것’ 아닌 것이 없다. 자기를 상대방이 보면 ‘저것’이 되는 줄을 모르고, 자기가 자기에 대한 것만 알 뿐이다. 그러기에 이르기를 ‘저것’은 ‘이것’에서 나오고, ‘이것’은 ‘저것’ 때문에 생긴다고 하였다. 이것이 바로 ‘이것’과 ‘저것’이 서로를 생겨나게 한다는 ‘방생(方生)’이라는 것이지.


삶이 있기에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기에 삶이 있다. 됨이 있기에 안 됨이 있고, 안됨이 있기에 됨이 있다. 옳음이 있기에 그름이 있고, 그름이 있기에 옳음이 있다. 그러므로 성인(聖人)은 일방적 방법에 의지하지 않고, [전체를 동시에 볼 수 있는]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있는 그대로를 그렇다 함(因是)’이다.


[하늘의 빛에 비추어 보면] ‘이것’은 동시에 ‘저것’이고, ‘저것’은 동시에 ‘이것’이다. 성인의 ‘저것’에는 옳고 그름이 동시에 있고, ‘이것’에도 옳고 그름이 동시에 있다. 그러면 ‘저것’과 ‘이것’은 따로 있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인가? '저것’과 ‘이것’이 상대적 대립 관계를 넘어서서 없어지는 경지를 일컬어 ‘도의 지도리(道樞)’라 한다. 지도리이기에 회전의 중심에서 무한한 변화에 대응한다. 옳음도 무한한 변화의 하나요, 그러므로 무한한 변화의 하나. 그러므로 ‘무엇보다 [옳고 그름을 넘어서서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밝음(明)이 있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손가락과 말(馬)


11. 손가락을 가지고 그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은 손가락 아닌 것을 가지고 손가락이 손가락 아님을 밝히는 것보다 못하다. 말(馬)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은 말 아닌 것을 가지고 말이 말 아님을 밝히는 것보다 못하다. 하늘과 땅도 하나의 손가락. 만물도 하나의 말.


[일반적으로] 되는 것을 일러 됨이라 하고 되지 않는 것을 일러 되지 않음이라 한다. 길은 다녀서 생기고 사물도 그렇게 불러서 그렇게 된다. 어찌해서 그렇게 되는가?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어찌해서 그렇지 않게 되는가? 그렇지 않다고 하니까 그렇지 않게 되는 것이다. 사물에는 본래 그럴 까닭이 있고, 그럴 가능성도 있지. 그렇지 못한 것은 하나도 없고, 그럴 수 없는 것도 하나도 없다.


12. 이와 같은 이유로 작은 풀줄기든 큰 기둥이든, 추한 사람이든 서시(西施)든, 사물은 아무리 엉뚱하고 이상야릇한 것이라도, 도의 견지에서 보면 모두 통하여 하나가 된다. 나누어짐이 있으면 이루어짐도 있고, 이루어짐이 있으면 허물어짐도 있다. 모든 사물에는 본래 이루어짐과 허물어짐이 따로 없이 모두 통하는 하나이다. 오로지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모두 통하는 하나를 깨닫고, [이것이냐 저것이냐 하는 차별의] 범주 대신, [양쪽을 포괄하는] ‘보편적인 것(庸)’에 머무를 수 있다.


보편적인 것이란 쓸모 있음을 말한다. 쓸모 있음이란 통함이고 통함이란 즐김이다. 즐김은 도에 가까움이다. 있는 그대로를 그렇다 하는 것(因是)이다. 그러면서도 그런 줄 모르는 것. 그것을 도(道)라 한다.



조삼모사(朝三暮四)


13. 사물이 본래 하나임을 알지 못하고 죽도록 한쪽에만 집착하는 것을 일러 ‘아침에 셋’이라 한다. ‘아침에 셋’이 무슨 뜻인가? 원숭이 치는 사람이 원숭이들에게 도토리를 주면서, ‘아침에 셋, 저녁에 넷을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성을 냈다. 그러자 그 사람은 ‘그러면 아침에 넷, 저녁에 셋을 주겠다’고 했다. 원숭이들이 모두 기뻐했다. 명목이나 실질에 아무런 차이가 없는데도 원숭이들은 성을 내다가 기뻐했다. 있는 그대로 인정(因是)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인은 옳고 그름의 양극을 조화시킨다. 그리고 모든 것을 고르게 하는 ‘하늘의 고름(天鈞)’에 머문다. 이를 일러 ‘두 길을 걸음(兩行)’이라고 한다.


* ‘하늘의 고름’이란, 의인의 밭에도 악인의 밭에도 고르게 비를 내리는 하늘의 공정함이고, ‘두 길을 걸음’이란 시비 등 이분의 세계에서 어느 한쪽에 기울지 않는 경지이다. 이런 것은 역시 사물의 본질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하는 ‘인시(因是)’의 문제라는 것이다 - (역자 주)


- 오강남 교수 번역의 장자 본문 내용에서 발췌




본문을 인용한 텍스트가 상당히 길다. 개인적으로 좀 짧게 나누고 싶지만 같은 주제를 반복해서 언급하는 단락의 특성상 그럴 수가 없었다. 이런 부분에서도 노자와 장자의 차이를 극명하게 느끼게 된다. 잠시 노자 도덕경이 쓰여진 배경에 대해 떠올려본다.


노자는 혼란해진 정세를 떠나 은둔하기 위해 어디론가 멀리 피신하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국경을 넘으려던 찰라 국경을 지키는 관리의 눈에 띄게 된다. 긴 글의 지루함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서라도 대화체로 당시의 상황을 구성해보자.


“어이쿠. 이게 누구십니까? 노자 선생님 아니십니까?”


아니, 사진도 없는 이 시절에 내(노자) 얼굴을 어찌 안단 말인가? 체면상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으흠. 그렇긴 하네만. 왜 그러는가? 내 여권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가?”

“무슨 그런 말씀을요. 그런 것은 아니고 노자 선생님의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습니다. 저도 그 가르침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도무지 자세히 배울 길이 없어서 혼자서 이리 저리 수소문 하던 차였는데 운명이 저를 버리지 않았나봅니다. 이렇게 선생님을 직접 뵙게 되다니요.”


일을 벌리면 벌릴수록, 더 하면 할수록 기를 소모하는 일이고 이는 도에서 멀어지는 일일진대. 쓸데 없이 나를 알아보는 이를 만나서 일이 귀찮게 되었구만. 어떻게 이 사람을 피해간다?


“도를 도라 부르면 이미 그것은 도가 아니라 하였거늘 (도덕경 1장,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그것에 대해 어찌 말로 설명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나를 이리 귀찮게 붙잡지 말고 그냥 놓아주게나.”


“아! 바로 그것입니다! (눈물을 줄줄) 그것이야 말로 제가 참으로 바라던 가르침입니다. 부디 바라건대 제발 가르침을 나누어주십시오 선생님!”


관리는 노자의 바짓가랑이를 잡고 눈물까지 줄줄 흘리는 터라 마음이 약해진 노자도 냉정하게 뿌리치고 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하룻밤 묵으며 남긴 글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도덕경이라. 도와 덕에 대한 가르침인 것이다.


띠리리~

<끝> 전설의 고향 음악 bgm


그런데 말이다. 정말로 글을 남긴 정황상 그런 것인지 노자 성격이 그런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노자의 문장들은 짧고 간결한 반면 장자는 세세하고 디테일하고 꼼꼼하기 그지 없다. 그렇지 않은가? 위의 장자 본문을 보자. 구구절절 온갖 다양한 묘사와 설명을 하고 있지만 장자가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세상은 상대적이다. 옳다 그르다, 이것과 저것, 삶과 죽음, 이루어짐과 허물어짐 등이 도(道)의 관점에서 보면 모두가 ‘하나’ 이다. 그 하나가 빛과 밝음의 속성을 가지고 있다. 세상은 거대한 회전이며 상대적인데 이 가운데 축에 절대성이 존재한다. 높은 경지에 도달한 사람만이 이 한가운데서 모든 변화와 상대성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상대성을 넘어선 절대성이 장자가 책 전체를 통틀어 이야기 하고자 하는 그 ‘하나’ 이다. 이것을 이해시키기 위해 장자는 수많은 비유와 구구절절한 설명을 들어가며 고군분투 하고 있다. 이 어리석은 사람들아! 한 번 말해도 못 알아들으니 내가 수 백, 수 천 번이라도 말해주마! 라면서. 두고 두고 느끼게 되는데 노자와는 참 다른, 정반대의 성격으로 보인다. 니가 이걸 몰라? 됐어. 모르면 모르는 대로 살면 되지 하는 듯한 노자와는 달리 장자의 노력은 한편으론 애처롭기까지 하다 - 라고 썼지만 이건 좀 오버인 것 같고.


이제 장자가 무엇을 말하려는지는 알겠다. 그것은 도와 하나되는 것이고 모든 옳고 그르다는 등의 상대적인 분별을 떠나는 것이다.


말로는 참 쉬운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장자도 직접 ‘높은 경지’ 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옳고 그름 따위 나는 상관 없네, 그런 척 하면서 속마음 드러나기를 막고 꾹 참아보자. 얼마 지나지 않아 열불이 날지도 모른다. 누구나 그런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얼마 전에 누군가에게 화를 냈더니 뒷끝이 너무 안좋게 느껴진다. 이 놈의 성질 좀 죽여야지. 이제부터 어떻게든 화를 내지 않도록 해야겠다! (결심) 하지만 그런 결심이 얼마나 오래 가던가? 길어 봐야 몇 시간일 뿐이다. 현실이 이러할진대 대체 어떻게 해야 옳고 그르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모든 상대성이라고 했다) 하는 판단과 분별을 떠날 수 있을까?


여기서 필자는 그 해결책으로 명상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런데 잠깐! 필자는 뻔하게도 <기승전명상> 인 사람인 것을 지금까지 글을 읽어온 독자라면 눈치챘을 것이다. 그러니 고리타분하게 명상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긍정의 뇌> 라는 책의 저자인 질 볼트 테일러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자. 하버드대의 뇌과학자인 그녀에게 어느날 갑자기 뇌졸중이 찾아왔다. 보통 뇌를 두 개의 구역으로 나눌 때 좌뇌와 우뇌로 나누어서 좌뇌가 판단이나 비판 등을 담당하고 우뇌가 감성적인 영역을 담당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좌뇌 영역에서 뇌졸중이 일어났고 우뇌의 기능은 완전히 활성화된 상태였다고 한다. 이런 상태에서 그녀는 상당히 특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 책 본문 중의 내용을 좀 살펴보자.


'맙소사, 뇌졸중이야! 내가 뇌졸중에 걸렸어!' 그리고 다음 순간, 이런 생각이 스쳤다. '우아, 이거 멋진데!' 일시적으로 황홀한 마비 상태에 빠졌다.

......

뇌졸중을 겪기 전에는 좌반구의 세포들이 우반구의 세포들을 지배했다. 왼쪽 뇌의 분석적이고 판단적인 성격이 내 개성을 좌지우지했던 것이다. 그러다가 출혈이 일어나 좌반구의 언어 중추 세포들이 망가지자 더 이상 오른쪽 뇌의 세포들을 억제하지 못했다. 그 결과 서로 다른 두 성격이 두개골에 공존하는 느낌이 들었다. 뇌의 양쪽은 그저 신경 차원에서 서로 다르게 지각하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다. 받아들이는 정보 유형에 두는 가치도 확연히 달라서 완전히 다른 성격을 드러냈다.

......

좌뇌는 내가 외부세계와 소통할 때 사용하는 도구다. 우뇌가 이미지들의 콜라주로 생각한다면, 좌뇌는 언어로 생각하고 끊임없이 내게 말을 건넨다. 뇌는 재잘거림을 통해 내가 삶에 뒤처지지 않게 해줄 뿐만 아니라 정체성을 드러내주기도 한다. 좌뇌의 언어 중추가 '나는 무엇무엇이다'라고 말함으로써 나는 영원한 우주의 흐름에서 떨어져 나온 독립적인 존재, 단일하고 견고한 존재가 된다.


- 질 볼트 테일러, <긍정의 뇌> 중에서



그녀는 책 본문의 많은 부분들에서 좌뇌의 기능이 거의 멈춤으로써 상당히 명상적인 경험을 - 온갖 황홀경과 우주와 하나되는 느낌 - 언급하고 있다.


필자가 중학교 때 친구 중에 환각제 (주변에서 구하기 쉬운 본드와 부탄가스 등)를 자주 경험한 친구가 있었다. 그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초능력을 비롯해서 상당히 명상적인 경험에도 가깝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실제로 아메리카나 남미의 인디언 등은 환각 성분이 함유된 연기 등을 들이마심으로써 명상에 가까운 일종의 트랜스 상태에 들어가는 일이 잦았다고 전해진다.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마약 성분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이런 약물에 의한 초의식이나 능력은 중독성으로 인한 부작용이 너무 크기 때문에 함부로 접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인간의 뇌와 의식은 너무나 방대한 영역이기에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 많을 것이다. 우리가 대부분 의식적으로 컨트롤 할 수 없는 영역을 어떤 식으로든 건드리게 되면 그에 상응하는 의식적 작용이 일어날 수 있다. 그리고 명상을 통해 적절한 훈련을 하게 되면 (오랜 시간과 훈련이 필요하겠지만) 위에서 언급한 물리적인 자극과 마찬가지로 의지적 제어만으로도 변화 - 초월적인 경험이나 깊은 명상의 상태 - 가 일어나게 된다. 이런 표현(뇌에 대한 물리화학적 자극 등)이 너무 물질적인 관점을 바탕으로 한 내용으로 들리는가? 하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의식적인 관점에서만 설명하자면 그 또한 적절하게 설명될 수 있다. 즉 같은 것을 여러 관점으로 돌려가며 이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삼각 기둥을 옆에서 보면 사각형이지만 위에서 내려다 보면 삼각형이듯이.


앞에서 테일러가 좌뇌에 뇌졸중을 경험한 내용은 상당 부분 명상의 경험과 닮아있다. 판단과 분별에서 떠나게 되었으며 우주와 하나된 황홀경을 느꼈다. 장자의 도(道)에 대한 설명과도 어찌 그리 일치하는지! 물론 우리는 도와 하나 되기 위해 좌뇌의 혈관을 막거나 파괴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될 것이다. 명상을 통해서 좀 느리지만 삶의 모든 방향에서 유익하게 다가갈 수 있는 결과이기 때문이다.


이번 장자 본문의 마지막 단락은 유명한 사자성어인 조삼모사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흔히 눈 앞의 차이에 급급하여 결국은 같은 것인 줄 모르는 어리석은 이를 비꼬는 말로 사용한다. 하지만 장자는 있는 그대로 인정(因是)하지 못하는 모든 이들, 옳고 그름의 양극을 조화시키지 못하는 모든 이들에 대해 조삼모사 한다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야기한다. 결국 성인이 아니고 도와 하나되지 못한 우리들 모두는 조삼모사 하는 원숭이와 같다는 것이다.


동물적인 특징을 중심으로만 보면 인간도 그저 동물의 한 종일 뿐일지도 모른다. 학자들은 호모 사피엔스의 생리적 특성 역시도 생존과 번식을 목적으로 진화되어왔음을 밝히고 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인간이 언어와 도구 (사실 일부 영장류는 간단한 도구를 사용한다고 알려져 있다) 등 다른 영장류와도 뚜렷이 구분되는 특징 이외에 가장 큰 차이는 배우고 익혀서 도와 하나되는 경지까지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이라고 필자는 믿는다. 비록 그 길이 쉽지만은 않더라도 말이다.


‘영장(靈長)’ 이란 영적으로 최고의 존재라는 뜻이다. 그리고 인간은 스스로를 ‘만물의 영장’ 이라고 부른다. 물질적 욕구 충족과 일회적 삶의 생존과 번식만을 주된 목적으로 하며 살아간다면 그런 존재를 과연 만물의 영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조금 더 양보해서 문화적 물질적 문명 사회를 이룩하는 것만으로 영장이라고 자화자찬 할 수 있을까? 그것은 좀 더 복잡한 형태로 조삼모사 하는 것은 아닐까? 무엇이 진정한 영장이라고 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장자의 이야기 속에서 깊이 사유해보아야 할 일일 것이다.



- 明濟 전용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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